한국 철학 (20) 썸네일형 리스트형 서경덕 이황이 화담집을 읽고 나서 감회를 읊은 다음 시를 보자. 화담 서경덕의 학문이 한쪽으로 치우친 경향이 있다고 비판한 이황이지만, 이 시를 보면 서경덕에 대한 그리움을 엿볼 수 있다. 탄식하노니 서경덕 어른이여 지금까지 영 내가 소홀했구나. 몸을던져 지해로운 성인에 의지했고 만물을 관조하며 자연의 진리를 즐겼네. 벼슬에 나아가는 데 의회하지 않았소 달빛아래 손수 호미질하였네. 만약 그를 만났더라면 십 년 책을 읽는 것보다 나았을 것을. 서경덕은 과거를 보려고 하지도 않았고 관직에 나간 적도 없다. 유학의 근본정신이 '자신의 몸을 닦아 다른 이에게까지 미치도록 한다[수기치인]'는 것이라면, 서경덕의 생애는 수기에 초첨이 맞추어져 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치인의 개념을 넓게 해석해, 정치 일서에 나가 국.. 지눌 3 금강경에 정통한 승려가 있었다. 그는 남방에 선종이 성하다는 말을 듣고 선종에 도전하러 길을 떠났다. 도중에 떡장수 할머니를 만났다. 할머니가 등에 지고 있는 게 무엇인지 묻자 그는 자랑스럽게 금강경 이라고 대답했다. 할머니가 말했다. 내 질문에 바르게 대답을 하면 공짜로 점심을 드리리다. 좋습니다. 금강경에 이르기를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앖다 하였는데 그대는 어느 마음에 점을 찍겠소? 승려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할머니는 그 승려가 그토록 자신만만해하던 금감경의 핵심 사상을 빗대어 말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문자를 떠난 일상사를 따져 묻는 말에 한마디도 대답할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교종만을 고집하여 수행에 소홀하면 문자가 자기의 참 본성.. 지눌 2 고려 초기에는 불교계의 치고 스승인 국사나 왕사들이 국왕에게 불교의 교화를 일반 백성에게 골고루 미치게 하여 국가를 태평하게 하라고 권유했다. 왕사와 국사들의 이러한 태도는 통치권과 야합하지 않고 백성을 대변한다는 의미가 있었다, 불교는 고려 사회의 사상을 통일하는 데 큰 역할을 했고, 외적의 침입이 있을 때 국민을 하나로 결집시키는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고려 중기로 오면서 일반 백성보다는 귀족들과 가까워졌고, 후기에는 왕사나 국사가 지배세력과 결탁하기도 했다. 또한 출신 성분에 따라 승려들의 교단 내 지위가 결정되는 경향이 두드러지면서 불교의 평등 이념도 점차 퇴색했다. 따라서 불교는 세속화 될 수밖에 없었으며, 불교의 가치관과 이상도 세속화되었다. 승려들은 환관과 결탁하여 사찰을 세우기 바빳고,.. 원효 3, 지눌 승려들이 모여있는 사원을 총림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부처의 말씀을 따라 수행하는 사람들이 숲의 나무처럼 많다는 의미다. 원효는 단순한 이론가가 아니다. 원효의 저술의 바탕에는 중생의 깨달음이라는 관심이 깔려 있다. 그래서 원효는 총림에 안주하지 않고, 총림의 다른 한쪽인 중생의 숲으로 기꺼이 들어 갔다. 중생의 깨달음을 위한 원효의 노력은 무애박을 두드리며 무애가를 부르고 무애춤을 추는 것으로 나타났다. 무애는 장애가 없다, 걸림이 없다 는 의미다. 무애가는 불교의 경전과 논 에서 뽑아낸 문구나 문장 등으로 지었으며, 움막에 사는 거지나 더벅머리 아이들까지도 따라 불렀다. 원효는 ㅌ촌락을 돌아다니며 모든 것에 걸림이 없는 사람이라야 한길로 생사의 번뇌에서 벗어나리 라는 노래를 지어 불렀다. 이렇게 원효는.. 원효 2 부처는 중생에게 고외와 갈등이 없는 세계를 보여주었다. 줄생의 마음속에 있는 여러 다툼들을 사라지게 하는 방법을 밝힌 것이다. 부처는 무쟁, 그 자체다. 따라서 부처의 세계에는 삐뚤어짐과 바름, 밝음과 어둠, 옳음과 그름의 대립이 없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우리는 상대와 자신을 나누면서옳고 그름을 따지는데 일숙하다. 원효는 이런 것을 지양하고 참된 조화의 세계를 지향했다. 당시 신라 불교는 부정의 논리를 통하여 진리를 밝히려는 중관 계통과 교리를 잘 분별하고 정립하려는 유식 계통이 각자의 방법만을 고집하여 대립하고 있었다. 그러나 원효는 어떤 이론이나 종파에 치우치지 않고 불교 경전을 두루 섭렵한다. 방대한 그이 저술에는 모순적인 교설이나 대립적인 이론들을 하나의 진리로 회통 조화시키려는, 곧 다툼을.. 원효 경기도에 안양이라는 곳이 있다 그런데 안양이라는 지명이 불교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불교에서 안양은 원래 아미타불이 계신 청정한 땅, 극락세계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 땅에 극락세계를 만들고자 했던 사람들의 염원이 안양이라는 지명을 낳았는지 모를 일이다. 불교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나무아미타불 이라는 말은 알고 있을 것이다. 나무는 중생이 부처님에게 진심으로 귀의한다는 뜻이고 아미타불은 극락세계를 주관하는 부처다. 중국의 법장이라는 승려가 48가지 맹세와 기원을 세워 자기와 남들이 함께 성불하기를 소원했는데, 결국 성불하여 아미타불이 되었다고 한다. 우리 나라에는 누구나 나무아미타불이란 말을 알 수 있게 만든 이가 있는데, 신라의 원효가 바로 그 사람이다. 원효는 불교를 처음.. 최익현 3 최익현은 일본과의 강화는 반드시 혼란과 명말을 초래할 거라고 경고했다. 물론 일본을 짐승으로 취급하여 배척하는 태도가 지나친 면이 있지만, 일본의 강압 아래 맺어진 병자수호조약의 부당함과 불평등함, 불리한 굥역조건에 따른 경제적 피해를 명확히 인식하고 일본의 침략성을 간파한 것은 매우 깊은 식견이었다. 역사는 아쉽게도 최익현이 우려한 바대로 되어갔다. 최익현은 일본을 강하게 비난하고 강화에 반대했지만, 만약 일본이 제국주의를 포기하고 인도를 회복한다면 협정을 맺을 수도 있다고 했다. 평화적 세계 질서를 부정하고 침략해 온다면 일본을 배척할 수 밖에 없지만, 일본이 평화적 세계 질서를 긍정한다면 그들과의 협정이 크게 문제 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최익현은 상소문의 마지막 부분에서 일본에 대해 다음과 같이 .. 최익현 2 이항로는 문명과 야만, 중화와 오랑캐의 구분을 뚜렷이하여 중화를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칠 것을 줄기차게 주장했다. 최익현은 스승의 뜻을 계승하여 직접 칼을 뽑고 나선다. 문명이란 지리적 개념이 아니라 정신적 개념이다. 문명은 도덕과 의리가 지켜지는 곳이면 어디에나 있게 마련이다. 최익현은 조선이야 말로 참된 문명국이라고 굳게 믿고 이를 지키기 위해 단호한 의지를 내보인다.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큰 과일이 마침내 야만의 손에 들어가려 하는데 과일을 삼키려는 열강들의 거센 도전을 막기에는 림이 너무나 부족하다. 문명의 빛이 꺼질지도 모르는 풍전등화 같은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이에 최익현은 분연히 몸을 일으켜 이러한 위기를 막아내는 것이 춘추대의를 실천하는 길이요, 힘써 배운 바를 몸소 실천하는 최선의.. 이전 1 2 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