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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철학

최익현 2

이항로는 문명과 야만, 중화와 오랑캐의 구분을 뚜렷이하여 중화를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칠 것을 줄기차게 주장했다.

최익현은 스승의 뜻을 계승하여 직접 칼을 뽑고 나선다.

문명이란 지리적 개념이 아니라 정신적 개념이다. 문명은 도덕과 의리가 지켜지는 곳이면 어디에나 있게 마련이다.

최익현은 조선이야 말로 참된 문명국이라고 굳게 믿고 이를 지키기 위해 단호한 의지를 내보인다.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큰 과일이 마침내 야만의 손에 들어가려 하는데 과일을 삼키려는 열강들의 거센 도전을 막기에는 림이 너무나 부족하다.

문명의 빛이 꺼질지도 모르는 풍전등화 같은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이에 최익현은 분연히 몸을 일으켜 이러한 위기를 막아내는 것이 춘추대의를 실천하는 길이요, 힘써 배운 바를 몸소 실천하는 최선의 방벙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위정 척사에서 정은 유교적 예의문물을 의미하고 사는 밀물처럼 밀려드는 제국주의 열강들과 그 문물을 뜻한다.

유교적 예의문물은 인륜의 도리를 존중하기 때문에 정이라고 하고 열강들의 문물은 신체적 욕망만을 추구한다고 보아 사라고 한것이다.

인륜을 존중하면 바람직한 인간의 모습을 갖추게 되지만, 신체에 매몰되면 짐승에 가까운 것이 된다.

인간이 짐승으로 타락하는 일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 최익현의 절실한 생각이었다.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수호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최익현이 특히 단호했던 것이 생활예절과 밀접한 의복과 두발 문제이다.

1884년에 소매가 좁은 옷을 입게하는 변복령이 내려졌고, 1895년에는 상투를 자르라는 단발령이 내려진다.

이러한 조치에 최익현은 내 목은 칠지언정 내 머리는 자를 수 없다. 고 굳은 의지를 보이며 크게 반발한다.

 

선비가 지키는 것은 선왕의 도이다.

선왕이 제정한 복이 아니면 입지 않고, 선왕의 뜻이 아니면 말하지 않으며, 선왕이 마련해준 행위가 아니면 행동하지 않는다.

지금 선왕의 복식을 바꾸는 것은 마땅히 치켜야 할 것을 잃는 것이다.

지켜야 할 것을 잃는다면 어떻게 선비라고 할 수 있겠는가?

선왕의 도를 지키다 죽는 것이 바로 선비의 의리다.

 

최익현으 의복이 중화와 오랑케의 문화를 구분하고 귀함과 천함의 사회적 신분을 나타내는 기본 형식이라고 본다.

최익현은 조선의 의복제도가 비록 옛 제도에 완전히 부합하지는 않지만 중화문물을 상징하는 것이고 동방 풍속의 자랑거리라고 보았다.

그래서 전통식 복제를 회복할 것과 김홍집 유길준 등 을미개혁 주도자를 처벌할 것을 요구한다.

개화파가 주장하는 개화란 중화의 제도를 오랑캐 제도로 바꾸고, 인류를 짐승으로 타락시키는 행위라고 여긴 것이다.

 

의복과 두발은 단순히 외양을 꾸민다는 의미가 아니다.

특히 효를 지고의 가치로 여기는 조선사회에서 머리카락을 자른다는 것은 가장 큰 불효였다.

또, 복식은 신분질서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이기에 신분에 맞지 않는 옷을 입는 것은 질서를 어그러뜨리는 일이다.

이에 최익현은 전통의복과 두발을 반드시 보존하려 노력했고, 반대로 개화파는 이를 바꾸는 것이야말로 우리 민족이 후진성을 탈피하는 시작이라고 생각했다.

 

개화를 추구한 이후 선왕의 법제를 모두 바꾸며, 한결같이 일본의 지휘에 따라 중화에서 오랑캐로 되게 하고, 인간에서 짐승으로 되게 하였으니 이는 개벽 이래 처음 있는 크나큰 사고다.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고자 한 개화파가 개인적 장의 영역에 속하는 변복령과 단발령을 강행하고자 한 이유는 무엇일까?

개화파가 일본의 사주를 받아 움직인다고 인식한 최익현은, 그 저의가 조선의 예의문물을 파괴해 민족 정체성을 해체시키기 위한 것이라며 크게 반발한다.

개화파가 전통형식을 무너뜨리는 데 있어서 중요과제로 삼아 추진한 변복령과 단발령은 강제적이 조치였을 뿐 아니라 한민족의 정체성을 파괴하려는 일본의 의도가 전제된 것이었다.  

 

쇄국을 주장하던 대원군이 실각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일본은 조선에 개항을 강요한다.

이것은 조선을 삼키자는 정한론의 초기단계였다.

일본은 마침 프랑스와 미국이 국내 사정으로 조선에 힘을 집중하지 못하는 틈을 타 일을 진행시킨다. 먼저 일본은 부산에 군함 운양호를 파견해 시위했다.

그리고 1875년 9월에는 운양호를 서해안으로 북상시켜 강화도까지 이르게 하여 초지진의 조선 수비대와 포격을 교환하고 돌아간다.

이듬해 1월 일본은 대사를 파견해 운양호를 포격했다는 걸 구실로 개항을 강요했고, 2월에는 군함 6척과 400여 명의 군대를 강화도로 이끌고 와 담판을 요구했다.

 

일본 군함의 불법침입으로 일어난 조선군과 일본군의 충돌 사건인 운양호 사건을 빌미로 조선과 일본의 수호조약 체결 회담이 진행되고 있을 때, 최익현은 도끼를 들고 대궐문 앞에 엎드려 상소를 올린다.

상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차라리 목을 쳐달라는 비장한 각오의 표시였다.

조선 역사를 통틀어 도끼를 들고 궐문 앞에 엎드려 상소를 올린 사람은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조헌과 조선 말의 최익현 두 사람 분이다.

이상소는 당시 재야 사림들의 생각을 대변한 것인데, 최익현은 다섯 가지 이유를 들어 개항을 반대했다.

 

첫째 강화의 주도권 문제로서, 이번 강화는 우리가 약함을 보인 데서 비롯된 것이다.

저들이 우리의 방비가 허술한 것을 알고서 강화를 맺는 경우, 앞으로 밀려올 저들의 한없는 욕심을 무엇으로 채워줄 것인가?

 

둘째, 교역의 부당성 문제로서, 일본의 물품과 재화는 생산이 무궁한 사치품이므로 이것과 우리의 유한한 생필품을 교역하면 몇년 안에 나라 경제가 파탄을 맞을 것이다.

 

셋째, 저들이 비록 이름은 일본인이나 사실은 서양 도적이다.

일단 강화가 이루어지면 천주교가 교역에 섞여 들어올 것이다.

장차 집집마다 사람마다 천주교를 접하면 신하가 임금을 임금으로 여기지 않게 될 것이다.

 

넷째, 강화가 성립해 저들이 이 땅에 살게 되면 백성들의 재산을 약탈하고 분녀자를 겁탈해도 힘이 약한 우리가 막을 수 없을 것이다.

 

다섯째, 병자호란 때의 강화와 비교하여, 청나라와의 강화는 오랑캐와의 강화이다.

오랑캐는 그래도 사람이다.

그러나 일본인은 재물과 여자만 알 뿐 도무지 인륜을 모르는 짐승이다.

짐승과 사람이 어울려 살면서 근심과 염려가 없기를 바란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최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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