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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철학

최제우 4, 최익현

최제우의 시천주 사상은 최시형에 와서 인시천 사상으로 손병희에 와서는 인내천 사살으로 발전되었으며, 그 시행방법은 사람을 하늘과 같이 섬기라는 사인여천으로 구체화되었다.

이 같은 시천주, 인시천, 인내천 사상은 인간의 존엄함을 하늘과 관련해 생각해 오던 우리 민족의 전통사상이 동학에 이르러 사람이 곧 한울 이라고 여기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최제우는 비록 세상이 험난하고 다툼이 빈번하지만 서로가 상대를 소중하게 맞이하는 마음이 곧 사인여천의 사회가 이루어지는 출발이 된다고 믿었다.

나 자신이 하늘을 모시고 있듯이 다른 사람도 하늘을 모시고 있다.

여기에 사람을 하늘로 대하는 인내천의 마음가짐이 자리한다.

 

동학은 인간에 대한 신뢰, 상대와 사물을 경건하게 대하는 마음이 없으면 참다운 인간이 되기 어렵다는 평범한 진리를 인간을 대하는 기본 명제로 삼았다.

또한 그러한 인격적 평든사상을 바탕으로 민족간의 평등, 사회간의 평등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쇠한 운이 다하면 성한 운이 오지만 현숙한 모든 군자 동귀일체 하였던가.

억조창생 많은 사람 동귀일체하는 줄 사십 평생 알았던가.

 

최제우는 세상이 혼탁해진 근본 원인을 사람들이 모두 자신만을 위하여 마음을 써서 천리를 따르지 않고 천명을 돌아보지 않는 데 있다고 보았다. 그것을 각자위심이라고 한다. 이는 사람들이 한울님의 마음을 잃어버리고 타성으로 살면서 불안과 공포가 습관이 되어 화합을 이루지 못하고 서로 중상모략하고 부정과 불의 혼란을 일으키는 마음을 말한다.

동귀일체는 각자위심으로 살아가던 사람들이 한울님의 마음을 회복하고, 한마음 한뜻으로 화합하는 것 곧 정신적으로 결합하는 것이다.

 

최제우의 원래 이름은 제선이었으나 어지러운 세상에서 고통받는 어리석은 백성은 구한다는 뜻인 제우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인류가 동귀일체되는 세상은 아직 오지 않았으나 최제우는 어리석고 성난 물결을 잠재우고 건널 수 있는 영부가 우리 속에 있음을 일깨워주었다.

그러나 조정은 동학의 세가 확산되자 동학을 혹세무민의 종교로 몰아 최제우에게 수배령을 내렸고 결국 최제우는 경주에서 체포되었고, 1864년 대구에서 효수형에 처해졌다.

동학을 창도한 지 겨우 3년 반이 지나서였다.

 

효수형

 

 

 

 

최익현

 

19세기 조선은 밖으로부터 밀려오는 두 가지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하나는 일찍이 산업혁명을 거쳐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이룩한 제국주의 열강의 군사력을 앞세운 경제 침탈이었고, 다른 하나는 전통가치체계와 상반되며 도전적이기까지 한 서학이 확대되어 간 것이다.

이러한 위기 상황은 규모나 내용 면에서 전혀 새로운 차원의 병화였으며, 이것은 동양 내부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서양이라는 새로운 문화와의 만남이었다.

 

동양과 서양의 만남은 방식과 과정이 어떠했든 역사의 흐름에서 보면 필연이다.

이 새로운 문화교류에 조선은 두 갈래로 대응한다.

한 갈래는 기존 가치질서를 굳게 믿어 외세를 경계하고 배척할 대상으로 생각한 위정척사파고, 다른 갈래는 서양의 발달한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나라의 부강을 도모하자고 주장한 개화파이다.

 

한말의 국가적 위기를 맞아서 위정척사파의 주류인 이항로의 화서학파는 뚜렷한 이념을 세우고 행동한다.

화서학파는 인도주의 정신에 입각하여 이민족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려는 유교의 의리사상을 투철하게 인식하고 이를 현실에서 유감없이 발휘한다.

이항로의 문하에서 김평묵, 유중교, 최익현, 유인석 같은 구국항쟁의 선비들이 여럿 나온 것이 이 점을 잘 말해준다.

 

화서학파 가운데 특히 눈길을 사로잡는 인물이 최익현이다.

최익현에 이르러 사상적으로 논의하는 단계를 지나 정의를 위해 일을 일으키는 단계로 전환되기 때문이다.

전통과 근대가 만나 소용돌이 치는 격변의 시대에 최익현은 왜 개화를 반대하며 마침내 목숨까지 걸고 의병운동을 일으킨 것일까?

 

마지막 문명의 나라.

 

면암 최익현은 이항로의 실천적인 사상에서 영향을 받아 주자와 송시열의 의리사상을 존경하고 높이 받든다.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남달랐던 최익현은 여러번 현실 문제에 대한 상소를 올렸는데 그 말이 매우 적절하여 듣는 사람마다 존경심을 표했다.

ㅊ히익현의 항일상소문은 조선국민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신문들은 최익현에 대해 충직하게 말한다, 굳세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고 평하면서 연일 최익현의 글을 게재했다.

당시 신문에 최익현의 언행을 수집하여 연재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문집인 면암집이 조용히 출판되어 널리 읽혀지기 시작했다.

1909년 일본 경찰이 압수한 출판물 가운데는 몰래 출판된 면암집이 922부나 되었다고 한다.

 

이항로가 죽은 뒤 최익현은 유인석과 함께 화서학파의학통을 대표하는 유학자로 자리매김되어 세상 사람들의 관심과 존경을 한몸에 받기 시작한다.

그는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것을 목표로 하여 위정척사의 기치를 내세움으로써 반개화적인 보수세력의 이론적 실천적 지도자로 활약했다.

최익현은 조선을 명나라가 망한이후 우리 나라는 주역의 64괘 가운데 하나인 박괘의 큰 과일 하나가 따먹히지 않고 남아 있는 모습과 같다 고 비유했다.

이것은 조선이 도덕의 마지막 보루라는 의미다.

명나라 이후, 중화의 문화를 찾고자 하는 자가 갈 곳은 조선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우리가 중화문명의 유일한 계승자임을 자부하는 동시에 이를 반드시 지키고 보호하겠다는 비장한 결의를 드러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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