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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철학

송시열 2, 최제우

복수설치의 참뜻은 바로 야만으로부터 문명을 수호하는 데 있었다.

조선의 치욕을 씻는 동시에, 청나라가 중국을 침략하여 나라를 빼앗고 문화를 야만화시킨 행위를 응징해야 한다는 것이 중요한 의리였다.

따라서 송시열른 북벌을 감정적 복수심의 차원을 넘어 인륜을 수호한다는 의미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사다리를 타고 하늘에 올랐다가 다시 땅으로 내려오는 것 과 같이 매우 어렵고 위험한 일이지만, 명분을 바르게 하는 의로운 일인 것이다.

송시열이 북벌을 준비하는 모든 일에서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하게 여긴것은 임금의 일심이었다.

임금의 마음에 일체 사사로움이 없어야 북벌이라는 중대사를 의리에 합당하게 준비 할 수 있고, 의리에 합당해야 거국적으로 단행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송시열은 의리에 합당하게 행한다면 비록 실패할지라도 후세에 할 말이 읶지만 의리에 맞지 않는다면 실패할 경우 뒷감당을 할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북벌은 군비를 확충하는 데서 시작할 것이 아니라 의리를 행한다는 어진 마음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주장 했다.

효종이 그러한 마음이 없이 북벌을 준비한다면, 그것은 개인적인 분노나 보복에 지나지 않으며, 그런 일은 실패하기 쉬울 뿐 아니라 힘써 행하는 참다운 의의도 없다고 보았다.

송시열의 북벌론은 도덕을 높이고, 부당한 폭력을 용납하지 않으며, 의리의 심법에 따라 일을 처리하는 의리정신의 참모습을 보여준 것이었다.

그러나 효종이 즉위한지 10년 만에 세상을 떠나고, 정파간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북벌의 바람은 점차 식어만 갔다. 북벌이 실현될 가능성이 희박해지자 송시열른 그 대안으로 존주론을 내세운다.

 

처음 효종의 북벌 계획은 오랑캐 청나라에게 주권을 유린당한 굴욕과 원한을 씻자는 복수심에서 출발했다.

그런데 효종과 뜻을 같이한 송시열이 북벌의 명분을 근원적인 대의를 천명하는 데 둠으로써, 북벌론은 이른바 주나라를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쳐야 한다는 존주양이를 사상적 바탕으로 삼기에 이르렀다.

춘추전국시대에 존주라는 말은 주나라 왕실을 높인다는 뜻이었지만 그 이후에 주 라는 말은 인의의 문화가 실현되는 곳을 가리키게 되었다.

인의의 왕도를 실현하는 자가 천하의 왕이 된다고 본 것이다.

존주양이에서 주는 국내정치나 국제관계에서 인의를 행하는 문명권이라는 의미고, 이는 이러한 문화가 결여되었거나 이에 역행하는 야만권 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송시열의 중화문화는 결코 한족의 전유물이 아니며, 교화한다면 어떤 민족도 그 문화를 소유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 지리상 지역을 구분할 수는 있어도, 지역에 따라 인간성을 다르게 보면 안 된다고도 했다.

춘추대의에 따르면 중국인이라도 오랑캐나 짐승 같은 행동을 하면 오랑캐로 간주하고, 오랑캐라도 겅인의 가르침을 행하면 중화인과 같이 높이는게 마땅하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명나라를 중심으로 한 중화질서가 청나라에 의해 붕괴된 것을 천하대란으로 인식했다.

중화문화의 담당자였던 명나라가 멸망하자 조선은 후계자로서 중화문화를 수호해야 한다고 인식했다.

청나라가 의롭지 못한 행위를 저지른 오랑캐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문명의 맥을 주나라 왕실에서 명나라로, 멸나라에서 조선으로 이름으로써 조선 문화를 수호하자는 논리가 성립하는 것이다,

이것은 조선이 중국의 속국임을 재확인하는 차원이 아니었다.

조선문화가 누구에게도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자신감의 반영이었다.

조선전기가 선진문화를 지닌 중국과 친화하여 그 문화를 배우려 한 시기였다면, 17세기 이후 조선은 자신이 그 문화의 유일한 담당자라고 인식했던 것이다.

송시열은 누구보다도 그러한 인식이 철저했다. 그는 조선문화의 수준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발전시키려고 힘껏 노력한 사상가였다.

 

송시열의 북벌론을 비판적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당시의 국제관계와 주변 정세를 무시하고, 조선의 현실적인 여건을 도외시한 채 무리하게 제기된 실현 불가능한 주장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것은 현실적인 관점이다.

그러나 부당한 무력에 자존심을 짓밟히고도 힘이 약하니 현실을 인정하는 길만 있는 것인가.

힘의 열세는 힘으로만 극복할 수 있는 것인가.

힘을 앞세워 난폭하게 침략한 자들을 향에 민족의 자주적 저항의식을 표출한 것은 성공이나 실패여부를 떠나 당연한 반응 이었다.

어떠한 사상이나 이념도 시대를 떠나 이해할 수 없듯이, 당시의 시대 성격을 충분히 고려하여 송시열의 북벌론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송시열의 북벌론은 잃어버린 땅을 회복하는 것보다는 상처받은 민족의 주체성을 회복하는 데 무게중심이 있엇다. 송시열른 도덕과 사회적 직분에 따른 인륜적 책임을 문제삼았고, 갠인듸 주체성이나 국가의 자주성은 이러한 인도주의 정신에 입각할 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를 지닐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송시열의 주자어류

 

 

최제우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 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동학혁명이 실패하고 전봉준은 처형되어 백성들이 슬퍼한다는 이 노래에는 동학 농민군에 대한 깊은 애정과 안타까움이 녹아 있다.

작은 체구 때문에 녹두라는 별명으로 불린 전봉준은 35세에 동학에 입교했다.

전봉준은 동학은 마음을 지키고 충효로서 근본을 삼고 보국간민하려는 것이었다. 동학은 마음을 지키고 하늘을 공경하는 도다. 때문에 나는 동학을 극히 좋아했다 고한다.

고부 지방의 접주였던 전봉준은 고부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이 폭정을 일삼자 이를 시정해달라고 진정했으나 거부당하자 농민과 동학교도를 이끌고 관아를 습격해 강탈당했던 곡실을 농민에게 배분하고 부패한 관원들을 감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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