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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철학

정몽주 2

우왕 원년에 들어 고려와 명나라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급기야 명나라가 조공을 빌미로 조선을 침략하겠다고 위협하자 고려 조정은 명나라 황제 주원장의 생일에 축하사절을 파견하여 성의를 보임으로써 두 나라 사이의 긴장을 해소하려고 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축하사절로 나서는 이가 없었던 것이다.

이전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가 주원장의 노여움을 사 유배당한 이들처럼 되지 않을까 모두 두려워 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조정에서는 의논 끝에 진평중을 파견하기로 결정했으나 당사자인 진평중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권신 임견미에게 노비 수십 명을 뇌물로 바쳐 병을 구실로 사퇴함으로써 책임을 회피했다.

당시 사절로 파견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로 여겼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임견미는 왕에게 진평중 대신 정몽주를 추천했다.

왕이 정몽주를 불러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근래 우리 나라가 명나라 조정으로부터 책망을 듣고 있는데, 이는 모두 대신들 잘못이다.

그대는 옛것과 지금의 사정에 두루 통하고있고, 또 내 뜻을 잘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이제 진평중이 병으로 인해 사신으로 갈 수 없다 하여 그대를 대신 보내려고 하는데,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왕의 질문에 정몽주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임금의 명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법인데, 하물며 명나라에 들어가 조회하는 일이야 어렵다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나라는 명나라 수도인 남견과 8천 리나 떨어져 있으니 발해에서 순풍을 기다리는 것을 빼고도 90일이 걸리는 일정입니다.

주원장의 생일까지 60일밖에 남지 않았으니 순풍을 기다리는 열흘을 빼면 겨우 50일밖에 남지 않는데 이것이 큰 걱정입니다.

 

정몽주는 명을 받은 당일 바로 길을 떠나 밤낮을 가리지 않고 주원장의 생일에 맞춰 도착할 수 있었다.

그간의 경과를 들은 주원장은 크게 감탄해 정몽주 일행을 특별히 우대하도록 했으며, 이전에 사신으로 왔다 유배당한 홍상재, 김보생 등도 풀어줘 함께 고려로 돌아올 수 있게 했다.

 

정몽주는 호가 포은이고, 경주 영일현 출신이다.

어머니 이씨부인이 난초 화분을 안았다가 놀라 떨어뜨리는 꿈을 꾼 뒤 낳았다고 해서 처음에는 몽란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러다가 아홉 살 때 이씨 부인이 검은 용이 나무에 ㄱ어오르는 꿈을 꾸다 정원에 나가보니 ㅁ침 몽란이 나무에 오르고 있었다.

그래서 이름을 몽룡이라 고쳤고, 성인식인 관례를 치르고는 몽주로 개명했다.

정몽주의 글 짓는 재주를 알려주는 이야기가 있다.

정몽주가 어려서 외삼촌 집에 있었던 때의 일화로, 어느 날 하녀가 남편에게 보낼 편지를 써달라고 하자 정몽주는 다음과 같이 써서 봉투에 넣어주웠다.

 

구름은 모였다 흩어지고 달은 차고 이지러지나 제 마음은 변하지 않습니다.

 

하녀가 그 말이 짧은 것을 아쉬워하자 아홉 살이었던 정몽주는 바로 봉투를 열어 아래 두 귀를 더 적었다.

 

봉함했다 다시열어 한 마디 덧붙이니 세상에 병 많으니 이것이 상사병인가 합니다.

 

초등학교 2학년 정도 나이인데도 이렇게 재치있고 깜찍한 글을 썻으니 그의 남다른 글재주를 짐잦하기에 부족하지 않다.

상사곡 이하는 제목의 이 글은 한때 널리 애송되었다고 전해진다.

24세에 과거에 급제한 정몽주는 공민왕 16년에 성균감의 정7품 벼슬인 성균박사에 임명되었고, 이색 밑에서 김구용 박상충 이승인 정도전 등과 함께 성균관의 면모를 일신시키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당시 주자의 사서십주가 유행했는데 그 오묘한 뜻을 이해하는 이가 매우 드물었다.

정몽주만이 그것을 비교적 정밀하게 분석하여 성리학적 해설을 더했는데 이러한 모습에 감탄한 이색은 정몽주를 동방리학의 으뜸이라고 칭찬했다.

정몽주의 사상은 이성계를 도와 조선왕조의 사상적 제도적 이틀을 다진 정도전에게 적지않은 영향을 준다.

두 사람은 이색을 스승으로 모시고 배움을 다졌던 가까운 선후배 사이였고, 서로 학문을 논하며 뜨겁게 사회개혁의 열정을 공유한 관계였다.

결국 두 사람은 정치적으로 등을 돌리고 말았지만, 정도전은 정몽주의 학문을 계승하여 자기 사상의 토대로 삼았다.

정도전은 정몽주가 유학의 경전에 정통하였음을 극찬하고, 고려 500년 동안 이러한 경지에 이른 사람이 얼마나 되느냐고 반문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혁명파에 협조하지 않아 역적으로 몰렸기 때문에 정몽주에 관한 많은 자료들이 유실되었다.

성리학에 대한 직접적인 저술은 전해지지 않고, 다행이 남아 있는 포은집에 수록된 주역을 읽으며 호수에서 물고기를 보며 동지에 읊조리며 호연의 건자 같은 시편을 통해 그의 성리학 사상에 다가갈 수 있을 뿐이다.

게다가 당시는 성리학을 수용하던 초창기였기 때문에 체계적인 내용은 뚜렷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정몽주의 글에는 성리학의 중요 개념 가운데 하나인 이치는 하나이며 세상의 존재들은 각기 이치를 갖고 있다는 리일분수의 논리가 명확하게 나타난다.

정몽주의 리일분수에 대한 이해는 젊은 시절에 이미 그 단서를 엿볼 수 있다.

정몽주가 과거를 볼 때 감독관이었던 김득배가 억울한 죽음을 당하자 정몽주는 그를 애도하면서, 하늘과 인간이 비록 다르나 그 이치는 하나다 라고 했다. 만물의 이치가 같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이학의 기본전제인 본성이 즉 이치 라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인간과 세게를 본질에서 통일시키는 것이 이성리학적 대 전제를 본체와 개체의 관계로 일반화 한것이 리일분수의 논리다.

또 정몽주가 환암 스님에게 보낸 두루마리 책에서 불교의 비현실성을 비판한 데서도 성리학의 리일분수 개념을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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