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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철학

최치원 2

당나라 말기는 중앙권력과 환관들의 수탈을 참지 못한 백성들이 봉기를 일으키던 때였다.

그 가운데 소금장수였던 황소라는 사람이 일으킨 난을 황소의 난 이라고 하는데 이때 고병이 토벌군의 책임자가 되자 최치원도 그 전쟁에 참여한다.

최치원은 황소가 읽고 간담이 서늘해져 침상에서 내려앉았다는 토황소격문을 써서 고병의 신임을 얻어 높은 관직을 받는다.

그러나 최치원은 29세 때 신라로 돌아온다.

신라에온 최치원은 외직을 전전하면서 진성여왕에게 시급한 현실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책입안인 시무책을 올렸으나 시행되지 않았고, 게다가 주위의 시기를 받아 벼슬에서 면직되었다.

이때가 40대 초반이었다

이때부터 최치원은 벼슬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명산대찰을 떠돌면서 일생을 보낸다.

최치원의 생에에서 전환점이 되는 부분들을 다시 짚어보자.

 

첫째 당나라에서 유학한 것이다.

12세의 나이에 최치원 스스로 유학을 결정했을 리는 없고, 이는 최치원의 아버ㅓ지가 결정한 것이었다.

사뢰 진출에 한계가 있는 6두품 집안은 신분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학문적 식견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길을 택한다.

더욱이 시라말기로 내려오면 당나라에 유학하는것이 하나의 유행처럼 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신분적 환경 아래서 최치원이 당에서 유학하게 된것이다.

 

둘째 당나라에서 말단 외직이나마 벼슬을 하던 최치원이 관직을

버리고 고병의 휘하로 들어간 것도 중요한 전환이다.

외직을 버린 것은 말단직을 벗어나 한 단계 높은 관직으로 나아가고자 욕망했던 것이지만 그 결과는 배고픔 이었다.

산 속에서 공부에 전념하던 최치원은 결국 자신의 처지를 밝히고 도와줄 것을 청하는 시를 지어 고병에게 보냈고, 고병이 식량을 보내주면서 최치원은 고병의 문객이 된다.

타국에서 느낀 배고픔과 절망감은 젊고 유능한 학자에게 어떤 비상한 각오를 하게 했을 것이다.

결국 최치원은 배고픔을 벗어나기 위한 수단으로 자신의 글솜씨를 십분 발휘하게 된다.

이 문사로서의 재질 덕분헤 최치원은 당나라 황제 희종에게 벼슬과 금으로 된 허리띠를 하사받기도 한다.

 

셋째 당나라에서 외국 학생으로서는 이례적인 대우를 받던 최치원이 고국인 신라로 돌아온 것이다.

당시 당나라는 말기에 접어들면서 점차 편협하고 배타적인 모습을 띠었고 더욱이 최치원의 상관인 고병은 여용지라는 도교 술사에게 현혹되어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 이에 실망을 느낀 최치원은 고병의 곁을 떠난다.

그러나 신라사회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왕권이 약화되어 지방호족들이 일어났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다.

게다가 골품제 아래서 6두품 신분의 제약을 알고 있던 최치원은 당나라와 신라 사이에서 고민했지만 결국 신라를 택한다.

 

넷째 신라에온 최치원이 자신의 식견을 바탕으로 포부를 펼치려 했지만 결국은 좌절하고 은거 생활을 하다가 생을 마감하는 것이다.

최치원의 시무책이 시행되지 못한 데는 당시의 권력구조도 한몫을 했다.

당시 신라는 골품제도를 기본 골격으로 한 왕과 진골 지방호족 지식인 계층인 6두품의 각축장이었다.

6두품은 골품제의 제약 때문에 진골의 권위를 극복할 수 없었고, 왕은 호족의 득세와 사회의 피폐로 무너져가는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 6두품과 손을 잡으려 했다.

그러나 진골귀족들은 골품제를 강하게 고수했고 왕위 쟁탈전이 끊이지 않았으며 지방호족들의 세력은 날로 확장되었다.

유교적 정치이념을 담은 최치원의 시무책은 정열로만 끝나게 된다.

 

12세라는 어린나이에 유학을 갔으니 당시 국제무대에서 정치와 문화의 중심이었던 당나라의 학술과 문화에 흠뻑 젖었을 것이다.

그래서 최치원을 두고 모화주의자, 곧 중국을 그리워하는 사람이라느니 민족의식 없이 중국을 섬긴 사대주의자라느니 말하기도한다.

그러나 최치원은 고병의 대변이기 전에 문필가였으며, 당나라의 관료이기 전에 신라인 이었다.

최치원은 당시 국제 학문이었던 유교 불교 도교를 깊이 있고 폭 넓게 이해하고 있었다.

나아가 유교 불교 도교는 대립 갈드의 관계가 아니라 조화로운 관계며 그 근본은 서로 통한다고 주장했다.

그런 최치원이 당의 사상이나 문화에 매몰되거나, 좌절 속에서 머물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학자로서 그리고 신라인으로서 당드림이나 그 좌절 속에 머물지 않는 길은 무엇일까?

여러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겠지만 최치원은 이런 수수을 밟는다.

 

최치원은 우선 사상에서의 보편성을 읽어낸다.

유교 불교 도교가 중국과 인도에서 발흥했고 신라는 그 뒤를 따른 것이지만, 사상의 핵심에 보편이 있다면 사상의 발원지나 종족이 서로 다름은 문제될 것이 없다.

역으로 중국과 인도에서 발흥한 유교 불교 도교가 신라에서고 진리성을 확보한다면 그 사상들의 보편성도 입증되는 셈이다.

다시말해 사상의 보편성을 확보하는 것은 신라인을 위해서나 각각의 사상을 위해서나 중요한 작업이다.

 

최치원은 이렇게 말한다.

하늘이 귀하게 여기는 것은 사람이다.

사람이 받는것은 도 다.

사람이 진리를 넓히는 것이고 진리는 사람에게 멀리 있지 않다.

무릇 진리는 사람에게 멀리 있지 않으며 나라의 다름이 있지 않다.

그렇기에 우리 나라 사람이 불교도 할 수 있고 유교도 할 수 있다.

 

진리라는 입장에서 보면 중국인 인도인 신라인이 그 나라의 다름으로 인하여 진리와 거리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최치원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각 사상의 핵심을 들여다보면 그것들은 서로 근원에서 만난다고 한다.

예를들어 그는 유교와 불교의 핵심 개념인 인과 자비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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