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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철학

최치원 3

인의예지신을 다섯 방위로 나누면 동방에 짝지어지는 것이 인심이다.

유교 불교 도교에 각각 이름을 세우면 맑고 깨끗한 지역에 나타나는 것을  이라고 한다.

인심이 바로 부처며 따라서 부처를 능인이라고 하는 것은 당연하다.

 

 

오방 오행을 유학의 인의예지신과 짝지으면 중앙-토-신,  동-목-인, 서-금-의, 남-화-예, 북-수-지가 된다.

방위로보면 동쪽에 있기 때문에 라가 인의 마음에 해당된다고 해석한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말이다.

또한 유교의 핵심인 인과 불교의 지향점인 청정이 모두 신라와 관련이 있다고 한 데서는 강한 주체성을 볼 수 있다.

나아가 세속적인 유교와 출세간적인 불교를 서로 다른 사상이라고 여길 수 있지만, 핵심에 들어가면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교의와 표현방식이 달라도 진리라는 입장에서는 서로 만날 수 있음을 간파한 것이다. 결국 최치원은 진리라는 관점에서는 인도인, 중국인, 신라인이라는 구별이 있을 수 없다고 본 것이다.

그런 최치원에게 진리 의 내용은 사람에 맞추어져 있다.

 

 

유교 불교 도교가 동방의 신라에서 꽃필 수 있는것은 오로지 그 사상들에 보편성이 있기 때문인가? 그렇다면 동방에는 그런 보편성을 가진 사상이 없는가? 이런 의문을 풀기 위해 최치원은 서적을 두루 읽고 연구한다.

그래서 얻은 결론이 동인의식과 풍류도이다.

동인이 간순히 중국의 동쪽 지방에서 사는 사람들을 가르키는 말은 아니다.

동서남북 각 민족의 특성을 기술한 중국의 여러 문헌은 특히 동방사람과 풍속에 대하여 매우 호의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예로 "동방을 이 라고한다. 이는 뿌리다. 어질고 살리기를 좋아해 마치 만물이 땅에 뿌리를 박고 나오는것 과 같다 그런 까ㄹ닭에 그들은 본바탕이 부드럽고 순하여 도리로써 인도하기가 쉽다." 든가

"동방 사람은 살리기를 좋아하는 것으로서 근본으로 삼고, 서로 사양하는 것으로서 주를 삼는다"는 구절들을 들 수 있다.

 

최치원은 우리 민족이 유교 불교 도교를 받아들여 꽃 피울 수 있는 자질을 선천적으ㄹ, 역사적으로 갖추고 있음을 중국 기록들을 통하여 확인했으며, 또한 실제로 당시 신라 사회의 분위기에서도 그러한 자질을 발견한다.

예를 들어 그는 불교가 신라에서 흥성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신라의 모든 성씨마다 섯가의 종족에 참여하고 임금과 같이 귀한분이 삭발하기도 했다.

이는 하늘이 환하게 중국을 돌아보고 바다로 이끌어 동쪽으로 흐르게 한 것이니, 군자들이 사는 곳에 부처의 진리가 날로 깊어지고 또 깊어질 것이다.

 

여기서 보면 신라에서 불교가 흥성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하늘이 그렇 한 것 이고, 또 하나는 군자들이 사는 곳 이기 때문이다.

앞의 것에서는 최치원의 신라인으로서의 정체성, 곧 돈인의식의 차원을 넘어 일종의 선민의식까지 엿볼 수 있으며, 뒤으 것 역시 신라인의 본바탕 성품을 말한 것이다.

 

불교뿐 아니라 유교도 마찬가지다. 우선 동인, 동이라는 말 자체가 예부터 우리 민족을 가르킨 고유명사이며, 이는 곧 유교의 핵심사상인 인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최치원은

'의가 인에서 말미암아 나오고, 서쪽이 동쪽으로부터 밝아진다"고도 말한다.

이는 앞서 중국 사서에서 동방 사람들은 천성이 어질고 살리기를 좋아한다 고 한 것과 맥을 같이한다. 곧 유교사상의 핵심인 인이 이미 신라인의 본성품이며, 따라서 유교가 신라에서 꽃피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지금까지 보았듯이 최치원은 유교 불교 도교 자체의 보편성과 신라라는 지역적 특수성이 서로 갈등 없이 조화롭게 꽃 필 수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거꾸로 신라에는 유교 불교 도교와 같이 보편성을 담은 사상이 없을까?

최치원의 논리대로라면 그렇지 않다.

신라라는 지역적 특성과 신라인의 본바탕 성픔이 인이고 신라가 군자의 나라이기 때문에 이미 신라라는 특수성 안에 보편성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최치원은 그것을 풍류도라 부른다. 그리고 그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유교, 불교, 도교의 특수성을 보편성으로 승화시켜 지역과 국적의 경계를 뛰어넘었다.

곧 최치원은 먼저 게뎨인의 단계를 거쳤고, 다음으로는 특수한 각 사상의 핵심을 서로 회통시켰으며, 그 사상들이 신라에 꽃피고 회통될 수밖에 없는 지리적이고 인간적인 필연성을 읽어낸 것이다.

그러나 유교 불교 도교가 아무리 보편성을 지닌 사상이라 해서 그 기원에서는 전적으로 신라의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래서 최치원은 신라의 것 보편성을 확보하고 있는 우리 사상을 찾다가 그 결과로 풍류도를 제시했다.

아니, 제시했다기보다는 신라인의 생활 속에 녹아 있던 풍류도를 철학적으로 재구성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풍류도를 잠시 살펴보자.

 

우리 나라에 오묘한 진리가 있으니 이를 풍류라고 한다.

그 가르침을 세우게 된 근원은 선사에 자세히 실려 있다.

실질적 내용은 곧 유교 불교 도교를 포함하고 있고 뭇 생명과 접촉하여 교화한다.

이를테면 집에 들어가 효도하고 밖에 나가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공자의 가르침이고, 무위의 일에 처하며 불언의 가르침을 행하는 것은 노자의 근본이며, 모든 나쁜 것을 짓지 않고 모든 착한 것을 받드는 것은 석가의 교화이다.

 

이 글은 난 이라는 화랑을 기리며 만든 비문의 서두로, 풍류도가 화랑도와 깊은 관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중요헌 것은 비록 아주 짧은 글이지만 유교 불교 도교가 아닌 우리 고유 사상의 원형을 밝히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풍류도는 유교 불교 도교를 수용하고 섭취한다는 소극적 성격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풍류도라는 고유 사상 안에 그 사상적 요소가 본래부터 들어 있는 것이다.

곧 이 글은 풍류도의 사상 내용을 알기 쉽게, 그리고 보편성이 확인된 사상들에 빗대어 설명한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풍류도가 유교 불교 도교와 공통될 수도 있고, 그 사상들은 한 단계 높은 차원에서 포괄할 수도 있음을 암시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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