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바람에 괴롭게 읊조리나니
세상을 둘러보아도 나를 알아주는 이 적구나.
깊은 밤 창밖에는 비가 내리는데
호롱 앞의 내 마음 먼 곳으로 달려가네.
위 시는 풍운의 일생을 살다간 고운 최치원의 작품이다.
최치원이 이 시를 언제 지었는지 정확하세는 알 수 없지만, 신라를 떠나 당나라에서 유학하던 시기에 지은 작품인 것만은 확실하다.
이 시는 타국에서 느끼는 외로움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 세상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것 에 대한 슬픔을 노래하고 있다.
어쩌면 최치원의 일생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최치원은 정치 사상 종교 긍에서 당시를 대표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으며 동방 문학의 시조로도 추앙받고 있다.
그런 최치원이 왜 외로움을 노래해야만 했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신라 상황 및 국제 분위기, 최치원의 ㅐㅇ에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후 중앙집권을 강화하고 사회안정을 이루기 위해 사회계층을 중앙귀족인
진골 지식인 계픙인 6두품, 지방의 명망가및 호족 계층인 5두품과 4두품 평민 이렇게 다섯 등급으로 나누었다.
각 계층은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춤계는 올라가는 경우보다 내려가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6두품과 5두품이 결혼하면 그 자손은 6두품이 되고 만다.
사회 계층을 이렇게 재편성한 것은 진골의세력을 강화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다.
그러나 신라 후기로 오면서 왕권이 취약해지자 그 틈을 노린 진골간의 권력 쟁탈이 심화되어 중앙권력이 약화되었다.
그러자 지방의 호족들의 토지를 겸병하고 병사를 양성하여 중앙정권에 대항하게된다.
한편 백성들은 중앙정권과 호족에게 이중으로 수탈당했다.
게다가 거듭된 가뭄과 홍수 때문에 생활이 이피폐핳대로 피폐해진 나머지 도적이 되거나 반란을 도모하기도 했다.
학문적 역량을 바탕으로한 6두품들은 통일 초기에는 진골에 협력했지만, 후기로 접어들면서 때로는 왕권에 또 때로는 호족에 협력한다.
이것을 간단히 정리해보자.
첫째 왕과 6두품은 왕권강화라는 지점에서 이익이 일치한다.
왕은 6두품에게 정치에 진출할 기회를 주고, 6두품은 왕에게 정치원리나 명분을 제공한다.
둘째 진골롸 6두품은 한쪽은 귀족 중심의 정치관을 다른 한쪽은 관료 중심의 정치관을 가졌기 때문에 반목할 수빡에 없었다.
진골은 통일 초기부터 가져온 중앙귀족으로서의 기득권을 고수하려 했다.
그러나 신라 중기에 들어 국립대학인 국학의 독서삼품과 출신이었던 설총, 강수 같은 학자나 당나라에 유학한 6두품 출신들은 학문적 역량을 바탕으로 하여 정치에 진출한 것이기 때문에 관료성을 가질 수빡에 없었다.
셋째 호족과 6두품의 관계는 경우에 따라 다르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불교 선종계통의 6두품 출신들은 호족과 결합하여 진골에 반발하는 경향을 나타낸다. 또 신라가 멸망하고 고려가 건국된 직후 6두품 출신 관료가 대거 등용된 것을 볼 때 유학자 출신의 일부 6두품도 진골에 반했음을 알 수 있다.
넷째 호족과 백성의 관계다.
백성의 봉기는 중앙정권뿐 아니라 호족의 수탈에도 원인이 있었기 때문에 봉기 초기에는 호족과 적대적 관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백성의 봉기가 대규모화되고 신라에 반다하는 세력으로 성장하자 궁예 견훤등 신흥세력은 특정지역에서 새로운 왕이 태어난다는 풍수도참설과 고구려, 백제 유민을 흡수해서 세력을 확장하는 발판으로 삼는다.
최치원이 유학했던 당나라 말기는 유교 불교 도교가 혼합되어 있으면서도 나름대로의 사상적 전환점을 갖는 시기였다
유교는 사회질서, 정치원리로서의 기능과 특징을 유지하면서도 형이상학적이고 이론적인 유학으로서의 질적 도약을 위한 기초를 마련하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도교가 불로장생을 가져다준다는 단약을 선호하는 당나라 황제들의 측근 도사 세력의 지지를 받으며 득세하면서 노자와 장자의 사상을 계승해 현실세계를 초월한 우주론적 언리를 논변하는 현학이 발달하고있었다.
불교는 인도불교에서 탈피해 중국화된 선종이 민간과 지식인 사이에 널리 퍼지고 있었다.
통일신라에서 유교는 6두품이 왕권 및 진골과 결탁하는 과정에서 발전하는데, 후기로 내려오면 당나라 유학생을 중심으로 신라의 귀족체제를 비판하고 관료제도를 요구하는 학문 경향을 갖게 된다.
불교는 중기의 교종중심의 교학불교가 전제 왕권의 약화와 더불어 쇠퇴하고 선종이 널리 확산된다.
선종은 정치적으로는 절대 왕권에 대하여 우호적이지 않았고 사상적으로는 왕실 및 귀족 중심의 교학 불교에 대항했으며, 계급적으로는 6두품 및 호족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도교는 신하통일 이전에는 고유의 풍습과 의식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가 통일 후에는 불로장생을 도모하는 신선술 및 수련을 중시하는 단학으로 발전한다.
도교의 비현세적 특성은 난세에 대처하는 방법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여기에 호족들의 풍수도참사상까지 널리 퍼져 신라 후기는 여러 사상들이 혼재하고 있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최치원은 신라 말기 지식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12세에 당나라에 유학해 18세에 외국 유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과거시험인 빈공과에 급제한다.
빈공과는 인접 국가를 예우하는 차원의 시험이었기 때문에 합격했다고 하더라도 고위 관직에 오른다는 보장이 없었고, 최치원 또한 말단 외직에 그치고 만다.
그나마 최치원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학문을 더 연마해 출세하리라 다짐하고 외직을 사임한다.
그러나 만리타국에서 작은 벼슬이나마 사임하고 나자 곧 경제적으로 어려어진 최치원은 문객들과 교규하기를 좋아했던 고병이라는 장군에게 의지하게 되었는데, 고병은 퇴치원의 문필을 높게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