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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철학

최치원4, 정몽주

최치원은 아직 부모 품이 그리울 나이에 만리타국 당나라로 떠났다.
타국이라는 설움에 배고픔을 더해 가며 공부를 하려고 했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웠고 그래서 잠시 남의 문객이 된다.
그러나 최치원은 신라인이었다.
당나라에서 주어진 벼슬도, 유교 불교 도교의 심오한 철학도 그의 포부를 모두 채워주지는 못했다.
그래서 기울어가는 조국으로 돌아와 신라인으로서 살고자 했다.
구러나 신라도 최치원을 기다리고 있지는 않았다. 최치원은 신러인의 현세적 삶에 환멸을 느끼고 가야산에 은거하고 만다.
결국 최치원은 고국에서도 이방인의 슬픔과 고독을 느껴야 했다.
대문호이자 철학자였던 그에 머물지 않고 그것을 극복했다.
당시 국제 학술이었던 유교 불교 도교의 보편성을 읽어내고 신라라는 지역적 특수성을 그 속에 융화 시켰다.
이는 신라라는 지역적 특수성을 극복하는 것만이 아니라 유교 불교 도교의 보편성 또한 확보해 내는 작업이었다.
최치원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신라라는 지역적 특성과 신라인 본바탕 성품에 근거하는 유교 불교 도교가 융화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찾아냈다.
이로써 그는 이방인의 슬픔을 말끔히 씻어내지 않았을까?
또 우리의 고유한 사상인 풍류도를 재구성해 냄으로써 고국에서의 비탄을 신라인의 자부심으로 승화시키지 않았을까?
그렇게 본다면 최치원은 철저한 신라인, 가장 신라다운 신라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빛이 왕성하고 또 충실하여 온누리를 빛나게 하능 것으로는 새벽 태양보다 고른것이 없고, 기웅이 온화하고 화락하여 만물의 힘씀에 미더움이 있눈 것은 봄바람보다 넓은 것이 없다.
이 위대한 바람과 떠오른 태양은 모두 동방에서 나오는 것이다.


신라의 자부심을 이보다 더 강하게 노래한 글은 없을 것이다.

 

 

정몽주

 

우왕 14년 3월 중원의 새 주인이 된 명나라는 옛 고구려 영토인 철령 이북 지역을 원나라로부터 인수하겠다는, 이른바 철령위를 설치하겠다고 고려에 알려왔다.

이에 고려 조정은 민감한 반응을 보였고 외교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명나라의 침략적 야욕을 꺾어야 한다는 최영 장군의 주장이 대세를 이루어 마침내 요동 지역으로 군대를 출동시키게 되었다.

우왕을 설득하는 데 성공한 최영의 계획대로 요동 정벌이 단행되기는 했지만 줄곧 반대의사를 표명해오던 이성계가 여러 장수들을 회유하여 말머리를 돌리고 말았다.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것이다

개경으로 회군한 이성계는 최영을 귀양 보내고 우왕도 강화도로 쫒아냈다.

이것이 위화도 회군이라 말하는 사건인데, 이는 고려의 제반 구조가 빠르게 무너지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위화도 회군으로 당시 사회의 여러 모순을 개혁하고자 노력하던 신진 사류들은 분열의 길을 걸었다.

그것은 각자의 역사의식에 기반한 현실 타개 방법론이 서로 달랐던 데 기인한다.

그들은 크게 고려 사회를 부정하지 않고 보전하여 중흥하려는 체제 유신적 입장과 고려의 국운이 이미 다 했다고 진단하고 새로운 나라를 세워야 한다는 체제 변혁적 입장으로 양분 되었다.

체제 유신적 입장의 대표적 인물로는 정몽주를 들 수 있고, 체제 변혁적 입장의 대표적 인물로는 정도전을 들 수 있다.

위화도 회군 이후 권력의 무게중심은 이성계와 정도전, 조준 등을 중심으로 한 혁명파 쪽으로 점차 기울었고 새 나라를 세우려는 움직임이 가시화 되었다.

이에 그동안 함께 사회개혁에 앞장섰던 정몽주는 이들과 첨예하게 대립한다.

온건하고 점진적인 사회개혁에는 찬성하지만 급진적이고 전면적인 방식으로 국가체제 자체를 부정하는 그들의 생각과 행동은 인정할 수 없었다.

고려가 현실적으로 깊이 병들어 시름시름 앓고 잇는 형편이었지만, 그렇다고 나라의 운수가 다했다고 믿지는 않았던 것이다.

정몽주는 고려 왕조가 사회적 모순을 바르게 고쳐 위기를 수습하여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혁명파는 정몽주의 역할과 비중이 어느 정도인지 자세히 파악하고 있었다.

정치적 위상이 높은 정몽주를 회유해 혁명의 길에 동참시킬 수 있다면 새나라 건설을 향해 비약적으로 질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이방원은 어느 날 술자리를 마련해 정몽주를 초대한다.

이방원은 정몽주에게 술을 권하며 동행하자는 취지를 담아 하여가를 불렀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서 백 년까지 누리리라

 

혁명의 길에 동참하여 평생도록 부귀영화를 함께 누리자는 제안이었다.

이에 정몽주는 단호하게 단심가로 화답한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고려에 대한 마음이 변함없을을 노래한 것이다.

이방원의 제의를 받아들이면 안락과 부귀가 보장된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를 과감하게 물리치며 허락하지 않았다.

여기서 이방원은 정몽주의 마음을 돌릴 수 없음을 알고, 심복인 조영규 등 몇 사람을 보내 정몽주를 살해했다.

조선 후기에 효종은 뜬 밤이면 단심가를 읊으며 백골이 티끌이 되어 낛이 있건 없건 오히려 마음을 고치지 않는다 하니, 천고에 어찌 이런 순수한 충성이 있겠는가? 하고 눈물을 흘렸다 한다.

정몽주의 단심가는 실로 천 년 뒤에도 귀신을 울릴 만한 것이었다.

인간은 선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며, 어떤 선택을 하는가에 따라 삶이 달라진다.

인간은 항상 안팎으로 다양한 도전에 직면하여 적절하고 합리적으로 대응하고자 하는 존재다.

따라서 이것과 저것 아니면 즈것을 선택하는 삶이 지속적으로 이어진다.

고려 말의 급격한 사회적 정치적 변동 속에 정몽주의 선택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었으며, 그가 지향하고자 한 길은 어떤 길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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