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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철학

송시열

병자호란은 임진왜란보다 전쟁 기간이 짧았고, 인명 손실과 물질 피해도 적었다.

그러나 신하 나라의 맹약을 맺고 왕이 무릎을 꿇는 등 조선이 입은 정신적 치욕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어제까지 호로라 멸시하던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와 오늘부터 임금과 신하로서 우호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조선인들에게는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인조 17년에는 인조가 항복했던 삼전도에 조선을 명망시키지 않은 청나라 은혜에 감사한다는 대청황제공덕비를 세웠으니, 이것은 우리 민족의 영광을 남긴 광개토대왕비와 비교해볼 때 대단한 치욕이었다.

청나라에 대한 적개심은 나날이 고조되었고 원수를 갚아 치욕을 씻자는 여론이 강하게 일기 시작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명나라가 망해 중국을 장악하게 된 청나라는 인질로 잡아갔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돌려보냈다.

형인 소현세자가 먼저 귀국했지만 갑자기 사망했고, 봉림대군이 돌아와서 세자로 책봉되었다

4년 뒤 그가 왕위에 오르니, 곧 조선 17대 왕인 효종이다.

효종은 즉위하자마자 강력한 북벌 의지를 가지고 군비를 강화해 나갔다.

북벌에 관한 소문이 은밀하게 퍼지면서 백성들로부터도 적지 않은 반향이 일어났다.

효종은 군비를 확장하기 위해 어영군을 제도화하고 기병대를 새로 만들었으며, 무사들을 대거 선발했다.

한편 양반들에게는 베 한 필, 승려에게는 쌀 세 섬을 세금으로 부과하여 군대를 기르는 재원을 마련했다.

군역 의무가 없는 사람들도 간접적으로 북벌에 참여하게 한 것이다.

그러나 효종의 북벌사업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했다.

조정 대신들의 거센 반대에 부딪힌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날은 저물고 길은 멀다 는 초조함은 느낀 효종은 재야에서 공부하던 선비들을 대거 덩계에 등용하여 그들과 함께 은밀히 북벌계획을 준비한다.

그때 등용된 대표적인 인물이 우암 송시열이다.

송시열은 효종의 지극한 신임 아래 국정을 지휘했고, 사람들이 이 두 사람의 결합을 유비와 제갈량의 만남에 비유할 정도였다.

송시열의 복수설치론은 삼전도의 굴욕을 씻고 명나라의 원수를 갚자는 것이 었지만, 북벌의 가장 큰 의의는 도덕적인 인륜을 지키고 야만으로부터 문명을 수호하자는 것이었다.

 

송시열은 주자를 공자 이후 최고의 유학자로 칭송한다.

평소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은 자주 했다.

 

말마다 옳은 것은 주자이며, 일마다 마땅한 것도 주자이다.

안약 총명함과 밝은 지혜로써 온갖 이치를 밝힌 경지에 가까운 사람이 아니라면 이와 같을 수 없으니, 주자가 어찌 성인이 아니겠는가?

 

송시열릉 평생 주자를 스승으로 삼아 주자의 학문을 기초로 하고, 주자의 행실을 표준으로 산 사람이다.

송시열은 주자대전, 주자어류같은 주자가 직접 쓴 저술은 물론 주자가 단 주석까지도 경전으로 추대했다.

송시열은 내가 배운 것은 주자대전 뿐이다. 감히 배운 것을 버리고 다른 학문을 할 것이가 라고 하였고  학문을 하는 자는 하루라도 주자어류가 없으면 공부를 할 수 없다. 의복을 팔아서라도 사야한다 고 말하는 등 주자학에 확고한 신념이 있었다.

송시열이 이처럼 주자학을 절대시한 것은 물론 학문적 입장에서 비롯되었겠지만, 당시의 역사적 현실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그때 조선의 현실은 주자가 살았던 남송 초기의 상황과 너무도 비슷했다. 북방 여진족인 금나라에 비참하게 패배하고 속국을 서약했던 남송시대에 주자는 북벌대의를 주창했고, 남송의 허ㅣㅇ제도 금나라에 복수할 뜻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송시열은 후대의 주자로 자임하고 주자의 북벌대의 정신을 그대로 계승하여 실천하려 했다.

어느 날 송시열과 북벌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던 효종이 주자의 말을 낱낱이 시행할 수 잇겠느냐고 묻자 송시열른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옛 성현의 말씀은 시세에 마땅함이 달라 행할 수 없는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자에 이르러서는 시세가 대단히 가깝고, 또 그때 당한 일이 오늘날과 서로 비슷하여 그 말을 하나하나 행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뒷날 죽음에임한 송시열른 제자들에게 이렇게 유언한다.

 

학문은 마땅히 주자를 주로 해야 하며, 아픔과 원통함을 참는것이 절하여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는 여덟 글자를 마음에 간직하고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에게 전수해야 한다.

 

여기서 인통함원 박부득이 는  주자가 주장한 것으로, 금나라에 당한 치욕을 씻기 위해 모든 백성이 항상 마음에 새겨야 한다고 강조했던 말이다.

철저히 주자를 계승하려고 하였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조선 역사에서 17세기 전반은 어느 때보다도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임진왜란 때 원군을 보내준 명나라가 새롭게 일어난 청나라에게 멸망 당하고, 또 청나라가 두 차례에 걸쳐 조선을 침입하는 등 조선을 둘러싼 정세가 급변하고 있었다.

청나라의 침략에 굴복해 심각한 민족 존망의 위기를 맞은 조선은 위기를 극복하는 것은 물론 , 앞으로 어떤 국가로 존속할 것인지 방향을 모색하고 정립해야 했다. 이때 송시열은 임금과 어버이를 높이고, 오랑케를 물리칠 것, 주자를 존숭할 것을 시대적 과제로 제시하고 자신이 그 소임을 담당하고자 했다.

송시열은 조선이 아무리 어려운 처지에 빠졌다 할지라도, 무력 통치에 굴복하지 않고 인륜을 고수하여 문화적 자주성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북벌론이 바로 그 이념이자 실천강령이었다.

 

송시열은 임금을 도와 복수설치하는것을 자신의 과제로 삼았다.

어지러운 세상을 피해 숨어사는 것보다 벼슬길에 나가 도를 행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송시열은 대의에 입각해 청에 복수하지 않으면 아들이 어버이를 알지 못하고 신하가 임금을 알지 못하여 짐승의 무리로 떨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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