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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철학

원효

경기도에 안양이라는 곳이 있다

그런데 안양이라는 지명이 불교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불교에서 안양은 원래 아미타불이 계신 청정한 땅, 극락세계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 땅에 극락세계를 만들고자 했던 사람들의 염원이 안양이라는 지명을 낳았는지 모를 일이다.

 

불교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나무아미타불 이라는 말은 알고 있을 것이다.

나무는 중생이 부처님에게 진심으로 귀의한다는 뜻이고 아미타불은 극락세계를 주관하는 부처다.

중국의 법장이라는 승려가 48가지 맹세와 기원을 세워 자기와 남들이 함께 성불하기를 소원했는데, 결국 성불하여 아미타불이 되었다고 한다.

우리 나라에는 누구나 나무아미타불이란 말을 알 수 있게 만든 이가 있는데, 신라의 원효가 바로 그 사람이다.

 

원효는 불교를 처음으로 빛나게 했다는 뜻으로, 원효가 출가한 뒤에 스스로 지어 부른 럽명이다.

스스로를 첫새벽이라고 한 것처럼 그는 신라 대중 불교의 새벽을 밝혔다.

또한 그는 생사를 벗어나 무엇에도 걸림이 없는 사람이었고, 교파의 대립을 넘어서 통불교의 사상을 전개한 사상가였다.

무엇보다 원효는 대중 속으로 깊이 들어가 그들을 교화하는데 힘쓴 실천 신앙인이었다.

 

 

원효의 어머니는 유성이 품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었다고 한다.

어느 날 밤나무 밑을 지나는데 갑자기 진통이 와서 남편의 옷을 밤나무에 걸고 그 밑에 자리를 마련해서 아기를 낳았다.

설화에서는 원효가 태어날 때 오색구름이 땅을 덮었으며, 그 나무를 사라수라 불렀다고 전한다.

이는 마야 부인이 친정으로 해산하러 가는 길에 무우수가지를 잡고 석가를 낳았다는 설화와 비슷하다.

중생이 근원적인 어리석음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새로운 문을 열어준 석가처럼 새벽을 밝힌 원효를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알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원효의 어린 시절은 그의 명성에 비해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다만 어린시절 이름이 서당이었고, 15세 전후에 자기 의지로 출가했다는 정도가 알려져 있을 뿐이다.

원효는 정해진 스승이 없었다고 한다.

이 말은 남에게 전혀 배운 적이 없다기보다는 진리 자체를 스승으로 삼는 그의 자세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런 이유로 원효는 어떤 이론이나 한 종파에 얽매이지 않으며 흐르는 물처럼 한곳에 머물지 않는 태도를 지닐 수 있었을 것이다.

 

폭넓게 진리를 구하던 원효는 의상과 함께 당나라 유학길에 올라 고구려를 통해 당나라로 들어가려 하였으나 첩자로 오인받아 갇혀 있다가 신라로 되돌아온다.

그리고 10여년 뒤인 45세에 백제가 망해 바닷길이 열리자 다시 당나라를 향해  출발했다.

 

원효와 의상은 어느 날 밤에 토굴에 들어가 잠을 잤다. 다음날 아침 눈을 뜨니 그곳은 토굴이 아니라 무덤 속이었고 그들 곁에는 해골이 있었다.

날씨가 좋지 않아서 무덤 속에서 하루를 더 지내게 되었는데, 밤중에 갑자기 귀물이 나타났다.

여기서 원효는 어제는 토굴이라고 생각해 편안했는데 오늘은 무덤인 줄 알고 잠을 자니 편안하지 않구나.

마음이 일어나므로 갖가지 법이 생겨나고, 마음이 멸하므로 토굴과 무덤이 둘이 아니다 는 생각에 도달하고 발길을 신라로 되돌린다.

어쩌면 널리 알려진 것처럼 해골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말이 원효의 깨달음을 극적으로 전달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원효의 깨달음은 해골 물을 마샸건 귀신에게 시달림을 받았건 빛나는 것이다.

모든 것은 마음에서 비롯된다 고 하고 마음 밖에 법이 없는데 무엇을 따로 구하겠냐며 당나라로 가던 걸음을 돌려 신라로 돌아온 원효는 세상의 모든 구분은 마음에 따른 것이며 마음이 지어낸 허상일 뿐 이라는 깨달음을 바탕으로 저술 작업에 몰두한다.

 

원효의 저술 가운데서도 특히 대승기신론소와 화엄경소는 중국에서 해동소라고 불릴만큼 큰 명성을 떨쳤으며 금강삼매경소가 중국에 전해졌을 때는 론 으로 준중할 정도였다.

불교에서는 부처님 말씀인 경에 대한 해설서를 소라고 하는데, 아주 뛰어난 고승들의 해석 말고는 론이라는 명칭을 부여받은 예가 극히 드물다.

이것만으로도 원효의 저술이 갖는 무게를 짐잦할 수 있다.

이 금강삼매경소는 지금 금강삼매경론으로 불리고 있다.

 

 

이제 본격적으로 원효의 자유롭고 큰 정신세계로 들어가보자.

그런데 그 전에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원효와 함께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던 의상에 관한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원효는 중국에 가지 않고도 중국에서 베우려 한 불법보다 훨씬 뛰어난 경지에 이르렀다. 스스로 깨닫는 사상이 더 높은 가치를 지닌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이런 측면을 지나치게 강조한다 보면 의상은 주체성도 없고 사상의 가치도 떨어진다는 말로 오해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과연 그런가? 다시 생각해 볼 문제다.

원효와 의상이 살던 시기에는 체계화된 불교이론을 국내에서 배우기가 매우 어려웠다.

따라서 부족한 면을 배우기 위해서는 불교를 우리보다 먼저 접하고 발전시킨 당나라로 가야 했다.

이런 사정을 고려하지 않은 채, 원효를 부각시키기 위해 의상을 상대적으로 깎아내리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

 

원효와 헤어진 의상은 당에 들어가 당시 화엄종 제2대 조사인 지엄의 수제자가 된다.

그러나 의상은 당나라가 신라를 침공하려 한다는 소식을 알리기 위해 급히 귀국하였고, 그 뒤 우리나라 화엄종의 문을 연다.

부석사를 근본도량으로 삼은 의상은 화엄경과 화엄일승법계도를 중점적으로 강의했다.

의상의 화엄철학은 그의 화엄일승법계도에서 그 정수를 찾아볼 수있다.

의상은 또 중국에서 새로운 화엄학 이론을 들여왔는데, 이 이론들은 화엄경에 대한 의상의 해석과 원효의 화엄경소와 융합되어 신라 불교를 깊이 있게 만든다.

 

또한 의상은 화엄사상에 미타 관음신앙을 곁들인다.

화엄사상이 한 없이 높은 불 보살의 지적인 세계를 그리고 있다면,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한 정ㅇ토신앙은 죄악에 빠진 중생의 정적인 세계를 그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화엄의 관념체계를 일반 민중이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기 때문에 의상이 이런 방법을 취했다고 보기도 한다.

의상은 부석사에는 아미타불을 모시고, 낙산사를 창건하여 관음불을 경배했다.

이렇게 중생속으로 들어가려고 한 의상은 왕실에서 토지와 노비를 주려고 하자, 불법은 지위나 신분의 높고 낮음이 없이 평등하기 때문에 토지나 노비는 필요 없다며 거절했다.

그리고 의상의 제자 가운데는 결혼하지 못할 정도로 가난한 사람이나 노비 출신인 사람들고 있었다.

이러한 의상의 태도는 일반 서민들에게 불교를 설파하고자 했던 그의 의지를 보여 주는 것이다.

 

원효가 주체적인 한국 불교의 큰 깃발을 세우고 대중 속으로 깊이 들어간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당에 유학하여 수준 높은 사상을 배우고 돌아와 중국의 불교를 새로운 모습으로 정착시킨 의상의 공로도 의미있는 것이다.

신라로 되돌아온 것, 당에 유학한 것 모두 진리를 얻기 위한 각자의 노력이었다.

원효와 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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