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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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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제우 4, 최익현 최제우의 시천주 사상은 최시형에 와서 인시천 사상으로 손병희에 와서는 인내천 사살으로 발전되었으며, 그 시행방법은 사람을 하늘과 같이 섬기라는 사인여천으로 구체화되었다. 이 같은 시천주, 인시천, 인내천 사상은 인간의 존엄함을 하늘과 관련해 생각해 오던 우리 민족의 전통사상이 동학에 이르러 사람이 곧 한울 이라고 여기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최제우는 비록 세상이 험난하고 다툼이 빈번하지만 서로가 상대를 소중하게 맞이하는 마음이 곧 사인여천의 사회가 이루어지는 출발이 된다고 믿었다. 나 자신이 하늘을 모시고 있듯이 다른 사람도 하늘을 모시고 있다. 여기에 사람을 하늘로 대하는 인내천의 마음가짐이 자리한다. 동학은 인간에 대한 신뢰, 상대와 사물을 경건하게 대하는 마음이 없으면 참다운 인간이 되기 어렵다는 평..
최제우 3 시천주의 주자를 존칭해서 부모와 같이 섬긴다는 것이라 했다. 곧 한울님 모시기를 부모 섬기는 것과 같이 하라는 말이다. 최제우는 네 몸에 모셨으니 가까이에 있는 한울님을 버려두고 멀리서 찾으려 한단 말인가 라고 했다. 이는 집에 부모가 계신데 밖에서 찾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고 집안에서 잘 모셔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천주를 밖에서 찾지 말고 내 몸 안에 모시고 있음을 알고 섬기라는 뜻이가. 또한 모든 존재는 천주를 모시고 있는 존재다 라는 말은 내가 한울님의 영기로 태어나 그 안에서 살지만, 동시에 한울님 역시 내 안에 살고 계시면서 나의 지극한 정성과 정성을 다해 소원하는것에 감응하고 응답한 ㄴ 실재임을 온전히 깨달아 한울님을 지극히 공경하고 받을어 모시라는 것이다. 이것이 최제우가생각한 진정한 경천..
최제우 2 정부는 사태를 조사하면서 민란의 책임을 오히려 동학교도에게 돌리며 동학을 탕압했다. 이런 정부의 대응은 고부 인접 지역의 동학교도와 농민들의 봉기를 불러일으켯다. 동학 농민군은 한때 중부와 남부 전역과 함남, 평남까지 항쟁규모를 확대시켰으나 결국 일본군과 정부군에게 진압되고 말았다. 옛 부하 김경천의 밀고로 잡힌 전봉준은 일본군의 감시 속에 서울로 호송되어 일본공사관에 갇혔다가 1895년 3월 29일 사형되었다. 그의 나이 41세였다. 동학이 매우 좋다 라고 한 전봉준은 동학의 이념과 교리를 나침반 삼아 뚜벅뚜벅 역사속으로 걸어 들어갔고, 새 세상을 열기 위해 목숨을 내놓은 동학 농민 군들은 각자가 신문고가 되어 세상을 울렸던 것이다. 19세기 중엽 조선은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극에 달해 온갖 부패가 ..
송시열 2, 최제우 복수설치의 참뜻은 바로 야만으로부터 문명을 수호하는 데 있었다. 조선의 치욕을 씻는 동시에, 청나라가 중국을 침략하여 나라를 빼앗고 문화를 야만화시킨 행위를 응징해야 한다는 것이 중요한 의리였다. 따라서 송시열른 북벌을 감정적 복수심의 차원을 넘어 인륜을 수호한다는 의미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사다리를 타고 하늘에 올랐다가 다시 땅으로 내려오는 것 과 같이 매우 어렵고 위험한 일이지만, 명분을 바르게 하는 의로운 일인 것이다. 송시열이 북벌을 준비하는 모든 일에서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하게 여긴것은 임금의 일심이었다. 임금의 마음에 일체 사사로움이 없어야 북벌이라는 중대사를 의리에 합당하게 준비 할 수 있고, 의리에 합당해야 거국적으로 단행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송시열은 의리에 합당하게 행한다면 비록 실패..
송시열 병자호란은 임진왜란보다 전쟁 기간이 짧았고, 인명 손실과 물질 피해도 적었다. 그러나 신하 나라의 맹약을 맺고 왕이 무릎을 꿇는 등 조선이 입은 정신적 치욕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어제까지 호로라 멸시하던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와 오늘부터 임금과 신하로서 우호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조선인들에게는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인조 17년에는 인조가 항복했던 삼전도에 조선을 명망시키지 않은 청나라 은혜에 감사한다는 대청황제공덕비를 세웠으니, 이것은 우리 민족의 영광을 남긴 광개토대왕비와 비교해볼 때 대단한 치욕이었다. 청나라에 대한 적개심은 나날이 고조되었고 원수를 갚아 치욕을 씻자는 여론이 강하게 일기 시작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명나라가 망해 중국을 장악하게 된 청나라는 인질로 잡아갔던 소현세자..
정몽주 3 인간사가 크고 작은 만 갈래로 갈라져도 모두 나름의 밝은 이치가 있어 처하는 곳마다 지극히 하면 종국에는 나와 너의 구별이 없어지는 것이 유가의 진리입니다. 그런데 불교는 이와 달리 허공에 걸어놓고 오묘한 이치를 이야기하며 일체를 덧없는 것으로 돌려 임금 신하, 아버지와 자식의 인륜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스님은 허신탄회한 분이니 바라건대 이를 바로잡아주시기 바랍니다. 리일분수를 사회에 적용하면 사회의 모든 구성원은 긴밀한 관계면서도 때와 장소, 각자의 지위에 따라 직분이 다르다는 말이다. 리일이 되기 때문에 자기를 미루어 다른사람에게 나아가는 것이 가능하다. 우리집 어른을 어른으로서 섬겨서 다른집 어른에게 미루어 나가고, 우리집 아이를 보살펴서 다른 집 아이에게 미루어 나간다. 분수가 되기 때문에 어버이를..
정몽주 2 우왕 원년에 들어 고려와 명나라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급기야 명나라가 조공을 빌미로 조선을 침략하겠다고 위협하자 고려 조정은 명나라 황제 주원장의 생일에 축하사절을 파견하여 성의를 보임으로써 두 나라 사이의 긴장을 해소하려고 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축하사절로 나서는 이가 없었던 것이다. 이전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가 주원장의 노여움을 사 유배당한 이들처럼 되지 않을까 모두 두려워 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조정에서는 의논 끝에 진평중을 파견하기로 결정했으나 당사자인 진평중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권신 임견미에게 노비 수십 명을 뇌물로 바쳐 병을 구실로 사퇴함으로써 책임을 회피했다. 당시 사절로 파견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로 여겼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임견미는 왕에게 진평중 대신 정..
최치원4, 정몽주 최치원은 아직 부모 품이 그리울 나이에 만리타국 당나라로 떠났다. 타국이라는 설움에 배고픔을 더해 가며 공부를 하려고 했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웠고 그래서 잠시 남의 문객이 된다. 그러나 최치원은 신라인이었다. 당나라에서 주어진 벼슬도, 유교 불교 도교의 심오한 철학도 그의 포부를 모두 채워주지는 못했다. 그래서 기울어가는 조국으로 돌아와 신라인으로서 살고자 했다. 구러나 신라도 최치원을 기다리고 있지는 않았다. 최치원은 신러인의 현세적 삶에 환멸을 느끼고 가야산에 은거하고 만다. 결국 최치원은 고국에서도 이방인의 슬픔과 고독을 느껴야 했다. 대문호이자 철학자였던 그에 머물지 않고 그것을 극복했다. 당시 국제 학술이었던 유교 불교 도교의 보편성을 읽어내고 신라라는 지역적 특수성을 그 속에 융화 시켰다. 이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