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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철학

지눌 2

고려 초기에는 불교계의 치고 스승인 국사나 왕사들이 국왕에게 불교의 교화를 일반 백성에게 골고루 미치게 하여 국가를 태평하게 하라고 권유했다.

왕사와 국사들의 이러한 태도는 통치권과 야합하지 않고 백성을 대변한다는 의미가 있었다,

불교는 고려 사회의 사상을 통일하는 데 큰 역할을 했고, 외적의 침입이 있을 때 국민을 하나로 결집시키는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고려 중기로 오면서 일반 백성보다는 귀족들과 가까워졌고, 후기에는 왕사나 국사가 지배세력과 결탁하기도 했다.

또한 출신 성분에 따라 승려들의 교단 내 지위가 결정되는 경향이 두드러지면서 불교의 평등 이념도 점차 퇴색했다.

따라서 불교는 세속화 될 수밖에 없었으며, 불교의 가치관과 이상도 세속화되었다.

 

승려들은 환관과 결탁하여 사찰을 세우기 바빳고, 왕을 위한 정자를 사원에 따로 지었다.

의종은 승려들에게 공양을 베풀면서 30근이나 나가는 은병을 만들어 그 속에 다섯 종류 향과 다섯 가지 약을 담아 절에 헌납했다고 한다.

이런 화려한 행사는 사치를 조장하고 불교를 타락의 길로 이끌었으며, 백성들의 고통은 날로 극심해져 갔다.

의종은 심지어 사원에서 만취하기도 했는데, 승려들도 이에 영합하여 술과 안주를 준비하고 왕을 초대하기도 했다.

 

이런 어지러운 분위기에서 불교는 종교로서 본래 역할을 다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선종과 교종의 대립도 심각했다.

이런 상황을 개선하고자 한 지눌의 노력은 수선사를 중심으로한 정혜결사 운동으로 나타났는데, 이 운동의 정신 원리가 바로 돈오점수였다.

 

돈오점수

 

 

지눌은 고려 의종 12년 황해도 서흥군에서 태어났고, 8세에 아버지가 출가시켰다.

1210년 53세의 나이로 입적한 지눌은 스스로 목우자라고 불렀으며, 시호는 불일보조국사이다.

지눌의 저서에는 수심결 원돈성불론, 간화결의론 등이 있다.

 

지눌도 원효처럼 정해진 스승 없이 다만 도를 좇아 부지런히 공부했다.

어느날 그는 대혜어옥 이라는 책을 읽다가 다음 문장을 읽고는 크게 깨달았다고 한다.

 

선이란 고요한 곳에도, 시끄러운 곳에도, 인연이 닿는 곳에도, 생각하고 분별하는 곳에도 있지 않다.

깨치고 나면 다름아닌 집안에서 일어나는 평상의 일이나 마찬가지다.

 

이말은 일체 경계에 구애됨이 없이 마음 자체가 독립하여 자유자재해야 한다는 의미다.

깨달음을 얻으려면 일상적인 모습과는 뭔가 달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산으로 들어가 자기가 맺고 있는 여러 복잡한 인연을 잠쉬 쉬기 도 한다.

그러나 지눌은 불성을 멀리 잇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일상적으로 갖고 있는 평상심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이해했다.

 

진리는 특수한 신분이나 계급, 특정한 장소에 국한되어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우리들의 일상생활 어디네나 진리는 있다.

앉고 일어서고 눕는, 우리가 늘 하는 행동 속에 진리가 있다.

우리들은 모두 밥 먹고 다른 사람을 만나면서 생활한다.

그렇지만 실제로 밥을 먹어야 할 때 밥을 먹는 사람은 드물다.

이는 식사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밥을 먹어야 할 때 생각을 먹는 일ㅇ 이 많고 잠을 자야 할 때 망상에 빠지곤 한다.

밥을 먹을 때는 밥을 먹는 일에만 힘을 기울여야 한다.

밥 한 그릇을 제대로 먹을 수 있다면 그는 이미 깨달은 사람이다.

 

석가모니는 어떤 한 가지 견해나 입장에 근거하여 다른 것은 모두 별 가치가 없는 것들이라고 본다면 이는 진리의 길을 가는 데 장애가 된다고 했다.

그러나 지울 당시 불교는 선종은 선종만읗 비호하고 교종은 교종만을 고수하여 서로 왕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서로 비방하고 공격하는 일까지 일어났다.

선ㅁ은 교외별전이라는 구호 아래 교를 멀리하고, 교는 교대로 선을 무시하여 그 대립이 대단히 심각했다.

 

백장스님의 설법이 끝난 후 대중들이 다 물러 갔는데도 한 노인이 계속 남아 있었다.

백장이 이상하게 여겨 그 노인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저는 오래 전에 이 절에 살았던 주지입니다. 그때 어떤 학자가 수행을 많이 한 사람도 인과에 떨어지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인과에 떨어지지않는다 고 대답했습니다. 그 대답이 저로 하여금 500년 동안 여우의 몸을 갖고 태어나게 했습니다. 바라옵건데, 스님께서 저를 대신해 한마디 하셔서 여우의 몸에서 벗어나게 해주십시오

 

그럼 내게 그때와 똑같은 질문을 하라

 

수행을 많이 한 사람도 인과에 떨어집니까?

 

인과에 어둡지 않다.

이말에 노인이 깨닫고 백장에게 예를 올린 뒤 말했다.

제가 이제야 여우의 몸을 벗게되었습니다.이 산 뒤에 여우의 몸을 두겠으니, 바라옵건대 저를 승려의 예로 장례를 치러주십시오.

 

인과에 어둡지않다는 것은 인과율을 부정하지도 인과율에 얽메이지도 않고, 인과를 인과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말이다.

500년 묵은 여우가 노인이 되어 나타났다는 백장의 말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선 수행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선 공부는 처절하고 혹독한 것이다.

자칫 말 한마디 잘못하면 500년 동안 여우의 몸을 받을만큼 무서운 수행인 것이다.

이 이야기는 비단 중국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고려 때에도 마찬가지여서 지눌이 선종의 폐단으로 지적한 것처럼, 조사들의 기이한 선문답이나 행동을 어줍잖게 흉내내면서 도를 깨달은듯 행세하는 승려들이 맣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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