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야만의 땅에 산다 하더라도 스스로 문명을 이륙하고 도의를 실천한다면 그것이 바로 춘추에서 숭상하는 문명이고 , 반대로 중국 땅에 산다 하더라도 도의 문명을 포기한다면 그것은 춘추에서 폄하하는 야만이다.
정몽주는 진정한 문명과 야만의 구분은 지역이나 혈통에 있는것이 아님을 천명하고, 스스로 문명세계의 주인공으로 자부한 것이다.
정몽주는 중국과 일본에 여러 차례 사신으로 다녀온 경험을 바탕으로 당시 일반인들보다 열린 세계관을 지니고 있었고, 따라서 매우 개방적인 주체의식을 갖게 되었다.
본래 주체성이란 객체에 대해 작용하는 나를 의미하는 것이고 보면, 한 민족의 주체의식 역시 다른 민족 문화와 연결된 관계성을 발견하지 못한 채 이야기될 수는 없을 것이다.
다음 시에서 정몽주는 문화 수준이 낮은 국가를 야만으로 취급하는 의식을 부정하고, 똑같은 인간과 인간이 어울려 살아가는 사회임을 밝히고 있다.
산천과 마을은 예나 지금이나 같은데 땅은 동쪽 바다의 해 돋는 곳에 가까워 아침 해가 붉네.
사람들은 단지 신선이 바닷가에 산다고 말하지만 백성과 사직이 일본에도 있음을 그 누가 알리오.
무늬 있는 옷은 생각건대 진나라 동자들로부터 변화한 것일 것이고 이를 물들임은 일찍부터 월나라 풍속과 통해서겠지.
고개를 돌리면 우리 나라가 응당 멀지 않으니 거기에는 천년 이래 기자의 유풍이 있도다.
정몽주는 고려의 전통과 정신을 마지막으로 계승하고자 한 인물이다.
그는 눈앞에 닥친 시대적 문제에 대해 현실을 도피하거나 현실에 영합하는 모습이아니라 기울어진 나라를 바로잡으려는 의지를 적극적으로 보여주었다.
정몽주가 조선을 건설하는 쪽으로 발길을 돌리지 않은 이유는 실리를 챙기기보다 자ㅣㄴ의 직분에 충실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정몽주가 죽은 뒤 고려왕조도 곧 몰락하고 만다.
그는 1392년 4월 4일에 생을 마감했고, 3개월 뒤인 7월 12일에 이성계가 왕위에 오름으로써 조선왕조가 창업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치열한 경쟁속에서 살고 있다.
명분만 강조하여 현실과 동떨어지게 행동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지만, 인간다움의 도덕 원칙을 저버리고 눈앞의 이익에만 집착하는 것은 더 큰 잘못이 아닐 수 없다.
정몽주는 무엇보다 자신이 맡은 직분에 최선을 다하고자 했고, 무엇보다도 도덕성을 먼저 확립해야 한다며 그 길을 따라굳건히 나아갔다.
자기의 안위만을 위해서 산 사람은 그 생명의 소멸과 함께 모든 가람의 기억 속에서 잊혀지지만 역사를 위해 산 사람은 역사가 계속되는 한 역사 속에서 연원히 산다는 말이 있다.
뜻을 이루든 이루지 못하든 도의 실현 그 자체가 소중한 것이다.
김상헌과 최명길
1592년부터 7년 동안 계속된 임진왜란은 동북아시아를 뒤흔든 큰 전쟁이었다.
일본은 명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길을 빌린다는 명분을 내세워 조선을 거의 초토화 시켰는데, 그 참상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또 임진왜란 와중에 만주에서는 여진족이 일어나 후금을 세우고 명나라를 위협하고 있었다.
임진왜란을 겪은 지 30여 년 뒤인 인조 5년, 후금의 침략을 받은 조선은 전쟁에 패하고 마지못해 굴욕적인 형제의 맹약을 맺고 강화를 성립시켰다.
이것이 정묘호란이다.
그 뒤 후금은 황제의 칭호를 쓰고 국호를 청이라 하고, 조선에게 신하의 예를 지키라고 요구했다.
조선이 이에 크게 반발하며 청나라의 요구를 단호히 거절하자 청나라 태종은 인조 14년에 10만 대군을 이끌고 다시 조선을 침략했다.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항전을 꾀했지만, 더는 버티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때 김상헌 등은 항복에 반대하며 끝까지 싸우자고 주장했고, 최명길 등은 굴욕을 참고 화친을 맺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위태로운 상황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는 것이 참으로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길일까?
김상헌에게 항복은 자주권을 박탈당하는 것이요, 나라가 문명에서 야만으로 추락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런굴욕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김상헌은 항복문서의 초안을 찢으며 죽음을 무릅쓰고 항전해야 한다고 외쳤다.
반면 스스로 항복문서를 가지고 전진에 들어가 화의를 교섭한 최명길은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 나라를 구하는 길은 대항하기보다 일시적으로 후퇴했다가 국력을 키워 뒷날을 도모하난 것이라고 보았다.
결국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나와 삼전도에 주둔하던 청나라 태종에게 우릎을 꿓었다.
여기서 청나라는 조선에게 명나라의 연호를 폐지하고 명나라와 교섭을 끊을 것, 왕자를 인질로 보낼 것, 명나라를 공격할 원병을 파견할 것 등 열한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이에 따라 인조의 두 아들인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청에 인질로 잡혀갔고, 항복을 끝까지 반대한 홍익한, 윤집, 오달제 등 삼학사가 끌려가 죽음을 당하기도 했다.
이것이 병자 호란이다.
화친을 반대한 김상헌은 이미 청나라에 잡혀가 있었고, 최명길도 호라이 끝난 뒤에 명나라와 비밀리에 내통하다 들켜서 청나라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타국의 감옥에서 만난 김상헌과 최명길은 서로의 심정을 아래와 같은 시로 표현했다.
김상헌에게
고요한 곳에서 뭇 움직임을 보니
아무런 꾸밈 없이 그대로 나타남이로다.
끓는 물이나 얼음은 모두 물이요
가죽 옷이나 칡베 옷도 모두 옷일세
일이야 혹 때에 따라 다를지라도
마음이야 어찌 도에서 어긋나랴
그대 능히 이 이치를 깨닫겠거니
말하고 조용한 사이에 각기 천기가 있는것을
최명길에게
성공과 실패는 하늘의 운수에 달린 것이니
모름지기 의를 살펴 돌아갈지어다.
비록 아침 저녁이 뒤바뀐다 하더라도
어찌 치마저고리를 둘러 입을손가
임시변통이란 현명한 사람도 그르치기 쉽지만
떳떳한 도리는 모든 사람이 어길 수 없는 것이라.
이치에 밝은 그대에게 말하노니
아무리 급하더라도 저울질은 삼갈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