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 2
부처는 중생에게 고외와 갈등이 없는 세계를 보여주었다.
줄생의 마음속에 있는 여러 다툼들을 사라지게 하는 방법을 밝힌 것이다.
부처는 무쟁, 그 자체다.
따라서 부처의 세계에는 삐뚤어짐과 바름, 밝음과 어둠, 옳음과 그름의 대립이 없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우리는 상대와 자신을 나누면서옳고 그름을 따지는데 일숙하다.
원효는 이런 것을 지양하고 참된 조화의 세계를 지향했다.
당시 신라 불교는 부정의 논리를 통하여 진리를 밝히려는 중관 계통과 교리를 잘 분별하고 정립하려는 유식 계통이 각자의 방법만을 고집하여 대립하고 있었다.
그러나 원효는 어떤 이론이나 종파에 치우치지 않고 불교 경전을 두루 섭렵한다.
방대한 그이 저술에는 모순적인 교설이나 대립적인 이론들을 하나의 진리로 회통 조화시키려는, 곧 다툼을 화해시키려는 정신이 가득하다.
원효가 말하는 화쟁이란 서로 가른 학설들 가운데 어느 하나를 고집하거나 버리지 않고 학설 사이의 모순과 대립을 해소해 손상없는 원융회통을 이루는 것이다.
사상이든 사삼이든 역사의 흐름과 시대 상황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효도 예외는 아니다.
당나라 유학길에서 깨달음을 얻은 것은 원효의 나이 45세 때의 일이고, 신라가 백제에 이어 고구려를 멸한 것은 668년 으로 원효의 나이 52세 때였다.
그러나 그 후에도 신라는 백제 유민들의 항거와 당나라에 맞서 677년 무렵까지 계속 전쟁을 치러야 했다.
이것은 원효가 개달음을 얻은 뒤 686년에 입적할 때까지 대부분의 생애를 치열한 전쟁을 보면서 지냈다는 얘기다.
또 원효는 당시 승려들이 대개 성 안의 대사원에서 귀족처럼 생활하면서 일반 서민들과 유리되어 그들을 교화하는 데 무관심한 것을 비판했다.
대다수 승려들이 자신들을 세속에 머물러 잇는 서민 대중과 다른 존재이 것으로 착각하고 있덨 것과 달리 원효는 이러한 분위기에서 벗어나려 했다.
더구나 신라는 삼국 가운데 가장 약세이면서도 삼국의 통일 꾀하고 있었으므로 사상의 통일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래서 원효는 나라간의 투쟁과 사상의 대립을 근본적으로 종식시키고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 사상 원리를 찾고자 했으며, 이것이 화쟁사상으로 표출된다.
원효는 화쟁을 이룰 수 있다는 근거로 일심을 제시했다.
일심이란 중생의 마음이요 부처의 마음이다 마음이 하나라면서 왜 중생심과 불심, 두 가지로 말하는가?
원효는 중생심과 불심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며, 미혹되면 중생심이 되고 깨치면 불심이 된다고 한다.
아끼는 진주가 있는데 실수로 짆륵에 떨어뜨렷다고 하자.
진흙을 뒤져서 진주를 꺼냈을때 진주는 더러워져서 본래의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중생의 마음, 부처의 마음도 이렇게 이해하면 된다.
내가 가지고 있는 진주는 하나다.
진흙 속에 떨어져 빛을 내지 못한다고 해도 진주는 여진히 진주다.
원효는 일심에는 두 체계, 곧 진여문과 생멸문이 있다고 한다.
두 문은 각기 마음을 바라보고 인식하는 관점이 다를 뿐 본질적으로는 모두 일심에 대한 이해다.
진여문이란 중생과 부처를 구별하지 않는 인간의 본래 마음을 인식하고자 하는 관점으로, 현상의 비본래성을 밝히고 그것을 부정하여 해탈에 이르고자 한다.
따라서 해탈에 이르고자 하는 과정은 끊임없는 자기부정의 노력과 그 연속일 뿐이다.
생멸문이란 인간이 본래 갖고 있는 깨끗한 마음에 무명이 덮여, 생겨나고 사라지고 변화하는 인간의 현실에서 풀발하여, 생명변화에 대한 번뇌망상을 타파하면 모든 존재의 신실한 성품인 진여자성이 들어나게 된다고 한다.
파도가 높이 오른 멋진 바다를 생각해보자.
높이 오른 파도와 고요한 바닷물의 모습은 다르다.
그러나 그 본질은 둘 다 물이다.
곧 원래의 바닷뭉에 무명이라는 바람이 불어서 파도가 생기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는 생멸문의 측면에서 보면 인간의 마음은 미혹된 모습과 깨친 모습, 더러운 모습과 깨긋한 모습이 뒤섞여 있음을 뜻한다.
원효가 한 마음에 두 문이 있다고 한 것은 두 문이 떨어지지 않는 관계이며 두 문 사이에 미묘한 작용이 있음을 의미한다.
일체이 구별이나 망상에 집착하는 분별망집을 버리고 한마음의 본원에 돌아가 궁극적 진리에 안주하는 순간 진여문이 그러한 가치 차별을깨뜨린다.
왜냐하면 진여문은 본래 분별을 깨뜨리는 작용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다시 그로부터 새로운 없이 발생한다.
왜냐하면 생멸문에는 본래 발생의 작용이 있기 대문이다.
그러나 이 업은 중생이 무지와 번뇌에서 일으키는 업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래서 원효는 이것을 불사의 한 업 이라고 부르고무명이 갑자기 다 없어지는순간 불사의한 업이 자연발생한다 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리하여 진여 생멸 두 문이 서로 떨어지지 않는 관계로 구성된 일심은 그들의 미묘한 작용을 통해 역동적인 대승의 경예를 전개하는 것이다.
대승이 중생의 마음을 대상으로 삼는다면, 중관은 진여의 측면을 밝히고 유식은 생기고 사라지고 변화하는 측면을 밝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중생의 마음에는 그 두 개가 다 있다고 말해도 될 것이다.
그러나 진주에 묻은 흙을 털어내는 방법에 대해 중관과 유식은 자신의 방법만을 고집하여 상대를 인정하지 않았다.
원효는 중관이 철저한 부정에 떨어져 허무주의에 빠지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또 유식은 모든 교리를 잘 분별하고 정립하기는 하지만 유 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고 비판했다.
원효가 비판한 이러한 이론적인 결함은 서로 떨어지고 대립된 상태에서 해결할 길이 없다.
그러나 이제 한마음으로 화합한다면 그런 이론적인 결함은 오히려 상대방의 결함을 보완해줄 수 있게 된다.
일심은 그 자체가 큰 지혜와
큰 밝음으로 세계를 두루 비추며, 너와 나의 구별없이 평등하다.
진여문과 생멸문이 비록 두 문이라고 하나 모두 일심이요, 그대로 중생심이다.
원효 당시 심각하게 대립했던 중관학과 유식학이 아무리 다르다고 해도 그들이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은 모두 증생의 마음일 것이고, 또 그들이 뜻하는 바는 중생의 마음을 정화해 종교적 가치를 구현하는 일일 것이다.
어렇게 본다면 이제까지 쟁론을 거듭해오던 중관과 유식은 마침내 일심에서 회통의 기반을 찾을 수 있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