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철학

최제우 2

규똑 2020. 6. 8. 18:22

정부는 사태를 조사하면서 민란의 책임을 오히려 동학교도에게 돌리며 동학을 탕압했다.

이런 정부의 대응은 고부 인접 지역의 동학교도와 농민들의 봉기를 불러일으켯다.

동학 농민군은 한때 중부와 남부 전역과 함남, 평남까지 항쟁규모를 확대시켰으나 결국 일본군과 정부군에게 진압되고 말았다.

옛 부하 김경천의 밀고로 잡힌 전봉준은 일본군의 감시 속에 서울로 호송되어 일본공사관에 갇혔다가 1895년 3월 29일 사형되었다.

그의 나이 41세였다.

동학이 매우 좋다 라고 한 전봉준은 동학의 이념과 교리를 나침반 삼아 뚜벅뚜벅 역사속으로 걸어 들어갔고, 새 세상을 열기 위해 목숨을 내놓은 동학 농민 군들은 각자가 신문고가 되어 세상을 울렸던 것이다.

 

19세기 중엽 조선은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극에 달해 온갖 부패가 만연해 있었다.

10만냥이 있어야 과거에 급제하고 감사 자리 하나에도 2만 냥이 있어야 하는데 그나마 안동 김씨만 가능하다 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렇게 사회체제 전반이 흔들리는 나라안의 사정과 마찬가지로 나라 밖의 상황도 조선을 위기로 몰고갔다.

특히 청나라가 아편전쟁에서 패하고, 영불연합군이 북경을 점령하자 조선은 큰 충격을 받았다.

게다가 서양 오랑캐가 여세응 휘몰아 조선에까지 쳐들어올거라는 풍문까지 돟았다.

이에 상부의 지시도 없이 관공서의 사무가 정지되었고, 민중들은 보따리를 싸서 산으로 피난하기도 했으며, 천주교에 입교해 서양 오랑캐의 침략을 피해보려는 시도도 있었다.

 

동학은 1860년에 수운 최제우가 창도했다.

동학은 정치의 부패에서 비롯된 윤리의 타락, 일본의 야욕, 서학의 도전과 서학을 앞세운 서양의 침략이 가시화된 상황에서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삶을 구한다는 문제의식에서 등장한 것이다.

 

최제우는 서학이 흥성하는 운수를 가지고있다고 보았고, 서양의 힘이 밀려들어오는 것을 두려워하고 경계했다.

종교체험 때 상제가 너를 세상에 나게 하여 사람들에게 이 법을 가르치게 하려 하니 내 말을 의심치 말지어다 라고 하자 최제우는 그러면 서도로 사람들을 가르칠까요? 라고 했다.

이는 최제우가 서학을 의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서양 사람들이 말로는 부귀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고 하면서 천주의 뜻을 내세워 다른 나라를 침략하고, 교당을 세워 그 도를 행하는 것을 보며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또한 최제우는 일본의 침략에 대해 개같은 왜적놈 이라며 강렬한 적개심을 보였다.

 

내가 또한 동에서 나서 동에서 받았으니 도는 비록 천도이나 학인즉 동학이라.......

.... 우리 도는 이땅에서 받아 이땅에서 폈으니 어찌 가히 서 라고 이름하겠는가.

 

조선 땅인 이곳 동국에서 한울님의 도를 받았고, 동국의 천도를 이 땅에서 펼 것이므로 동학이라고 한다는 최제우의 말은 서학에 대한 저항의식과 민족의식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최제우는 21세 때부터 10년 동안 세상을 돌아다니며 구도생활을 했는데 이때 느낀 조선사회의 부패와 사회제도의 모순이 사상적 기반 형성에 큰 영향을끼친다.

32세 때 최제우는 금강산에서 왔다는 한 스님에게 책을 한 권 받는다.

이때 받은 책이 을묘천서다.

최제우에게 이 체험은 큰 의미가 있다.

그 뒤 비로소 기존의 학문 안에서 해법을 찾던 방식에서 벗어나 하늘에 기도하는 종교적 수행 방식으로 전환하기 때문이다.

이책은 지금은 전해지지 않으며, 기도하라는 가르침이 담긴 책이라고만 알려져 있다.

 

또한 최제우는 1860년 4월 5일에 한울님과 직접 문답을 주고받으며 가르침을 받는 결정적인 종교체험을 했다.

이후 7~8개원 동안 몇 차례 종교체험을 더 겪으면서 최제우의 생각은 더욱 체계적으로 다듬어졌는데, 그사상이 우리말 노래 형식으로 된 용담유사와 한문으로된 동경대전에 담겨있다.

 

최제우릐 글에는 운수에 관련된 말이 많이 나온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지금 조선의 운수는 험난한 산을 넘는 것처럼 힘들어서 백성들의 신세가 가련하지만 많은 백성들이 태평가를 부를 수 있는 날이 머지않아 올 것이라며 긍정적인 예언을 하고 있다.

동학의 이런 예언적 경향은 기본적으로 최제우의 종교체험에서 시작되었겠지만, 그가 살던 시대의 분위기가 예언가적 경향을 더욱 강화했다고 할 수있다.

예언이 불합리한 현실을 미래의 어느 때에 투영해 미래의 시점에서 현실을 개선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볼 때, 최제우의 예언은 당시 상황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것일 뿐 아니라 반드시 실현되기를 바라는 이상사회에 대한 기대였다.

최제우를 따르던 많은 사람들은 동학사상을 통해 새시대가 열리기를 희망했던 것이다.  

 

최제우는 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이니라 는 한울님의 가르침을 받는다.

곧 한울님 마음이 나의 마음이란 뜻이다.

이 문답을 통해 최제우는 한울님이 내마음에 모셔져 있다는 것을 확실히 자각한다.

한울님이 밖에 있지 않다는 것은 나의 몸이 한울님을 모신 거룩한 곳이라는 인식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우리모두는 한울님을 모신 평등하고 성스러운 존재다.

또한 최제우는 이 문답을 통해 시천주라는 동학의 제1원리를 도출해낸다.

시천주의 천주는 한울님으로 기독교의 천주와 의미가 다르다.

단지 이것을 한자로 천주라고 표현했을 뿐이다.

 

최제우는 시천주의 시를 안에 신령이 있고 밖에 기화가 있어 온 세상 사람이 버리지 못하는것이라고했다.

내유신령은 사람이 태어날 때 생기는 신령한 한울님 마음 이다.

외유기화는 어머니 뱃속에 잉태될때, 우주에 꽉 차 있는 한울님의 기운, 곧 지기의 조화로 이치와 기운이 엉키어 모태에서 사람의 몸을 이루는 것이다.

따라서 한울님을 모시게 되는 것은 바로 잉태될 때 부터다.

 

동경대전
용담유사